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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곳간

인과의 씨앗[업]은 썩지 않는다

[1] 인과는 당신들이 살아오면서 저지른 죄[업], 그 업을 받지 않고서는 피할 수도 없다. 그래서 썩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법문도 알아듣지 못하면, 그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다.

내 짐을 지지 않겠다면,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내가 되받지 않는다면, 누가 받을 것인가.
좋은 말이든 나쁜 일이든, 내 짐을 내가 지지 않겠다면, 누가 대신 져 줄 것인가.
대신 밥 먹어 주고 대신 잠자 줄 수 없듯이, 대신 똥 누고 대신 아플 수 없듯이, 내 짐을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은 철칙이다.

한 치의 에누리가 없는 인과의 법칙이다. 누가 대신 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아무리 관세음보살을 찾고, 아무리 다라니를 외어도 자작자수의 법칙엔 예외가 인정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대신 짐을 들어주고 싶어도, 아니면 더 보태 주고 싶어도, 야속하지만 예외는 인정되지 않는다. 고로 지금 내게 닥치는 일체의 경계들, 밖에서 다가오고 안에서 솟아나는 일체의 일들, 사건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그 언제인가 내가 지었던 모든 행위들의 결과이다.

인과의 씨앗은 썩지 않는다. 고로 피하고 싶어도 피할 길이 없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짓고 받는 그것을 팔자 운명이 업의 숙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반가운 소식이 있다. 세존께서는 삶을 고라고 단언하셨지만, 아울러 고의 멸도를 가르쳐 주셨다. 해탈의 길, 열반의 길도 몸소 보여 주셨다.

세존께서 성취하고 보여 주신 길은 완전한 자유, 영원한 즐거움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내게 다가오는 경계가 마음에 들면 그것이 오래 계속되기를 바라고, 그것이 고통이라면 하루 속히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인지상정이구나!
그러나 놓쳐서는 안 될 것은 그 경계의 참된 원인을 살펴서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는 길이다.
따지고 보면 나라는 존재는 쉴 새 없이 고락을 만들어내는 생산 공장과 같다. 그러므로 고의 원인을 밝혀내지 않는 한 하나가 지나가면 또 다른 고가 닥쳐오는 것을 면할 길이 없게 된다. 인생이 고해라지만 동시에 나를 제도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생은 마냥 고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고다, 업보다, 운명이다, 하기 이전에 일체 경계를 놓고 관하는 수행에 전념할 일이다. 요즘 사람들이 이 법문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기를 바랍니다_()()()_

[2] ‘인연’이라고 하는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인과’라고 하는 것은, 우리 불교 교리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떠한 원인에 의해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인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을 들여야만 한다. 불교는 어느 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가 아니다. 모든 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요, 마음을 찾아서 깨쳐가는 수행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 ‘마음’입니다. 이 마음 하나만을 주장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우리는 흔히 운명이다, 숙명이다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운명과 숙명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존재요, 그 속에서 꼼짝달싹 못 하고 늘 거기에 구속받고 거기서 시키는 대로 따라가야만 되는 운명적인 존재인가? 그러한 사상과 생각을 확 바꿔야 합니다. 운명론을 능히 부술 수 있는 것이 바로 불교 교리 교학입니다. 무엇 때문에 거기에 길들여져서 질질 끌려 다니고, 눈물을 흘리고, 하늘을 보면서 한숨을 쉬면서 자기 일생을 그와 같이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까?

불교는 운명과 숙명을 끌어안고, 산산이 때려 부셔서 다시 창조하고, 또 개조하고 이렇게 해서 끌고 갑니다. 이 마음 하나로써 모든 것을 다 이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2500년 전 이 세상에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선언하신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화엄경>에는 ‘일체유심소조’라고 간단하게 말씀을 해 놓으셨습니다. 중생계는 인연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때문에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늘 가져야 합니다.

인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인연이요, 하나는 좋지 않은 인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불어 살기 때문에 서로 간에 인연을 맺되 좋은 인연을 맺고 살아야만 마음도 편하고 서로 도움도 받고, 고민도 없고, 고통도 덜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좋지 않은 인연은 어떻게 되나요? 그것도 짊어지고 끙끙거리면서 가야만 되느냐?
운명론을 믿는 사람은 아마 그렇게 할 겁니다. 그 악한 인연, 좋지 않은 인연을 확 때려 부수어서 창조하고, 또 바꾸고 그래서 좋은 인연으로 정립해서 회향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자신이 노력하면 됩니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인색한 게 보통 우리 업 많은 중생들의 생각입니다. 지금부터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냉엄하게 사정없이 비판을 하고 다른 이에게는 관대하게 이해하고 용서하십시오. 내가 조금 양보하고, 조금 하심 하고, 내가 조금 상대방을 이해하고. 이렇게 하면 능히 좋지 않은 인연이 좋은 인연으로 술~술 뚫려서 좋은 인연이 됩니다. 이게 바로 나쁜 인연을 좋은 인연으로 바꾸는 작업의 하나가 됩니다.

부처님은 우리를 늘 안고 계십시다. 부처님은 한 사람도 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부처님 말씀을 어기고, 동쪽으로 가라면 서쪽으로 가는 청개구리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전부 안아서 끝까지, 이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그 대자비심을 발휘해서 고통이 다 없어지고 행복하게 살 때까지, 성불할 때까지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부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뭐 좀 하다가 안 되면 ‘기도를 그렇게 했는데도 소용없다’하고 맙니다. 그건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도할 때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잡념망상으로 하면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신심과 원력과 정성을 다 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뼈를 깎는 마음으로 살을 에는 마음으로 피 눈물을 흘려가면서 하는 그 기도 말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늘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데 가장 무서운 적이 뭐냐?
바로 게으름입니다. 게으른 것, 이 게으름을 망치로 때려 부수어서 다 내쫓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부단히 담금질하는 것. 이것을 ‘절차’하고 ‘탁마’한다고 합니다. 담금질해서 아직 미완성 자리를 완성되게 만드는 것도 자기 마음입니다.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아무도 자기를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도는 내가 뭔가를 갈구하고, 소원할 때 그것을 이룩케 하는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도, 주력도, 108배도, 간경도 모두가 기도의 개념에 포함이 됩니다. 그러한 포괄적인 기도, 수행 전체를 개념으로 하는 기도를 지금 나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성향에 맞는 것을 하나 잡아가지고 꾸준히 하되 게으르지 말고, 정성을 다 해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기도는 꼭 성취됩니다.

두견새가 우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두견새는 모든 새들이 다 잠이 들고, 모든 짐승들이 잠이 들고, 사람마저 잠이 들고, 천지가 적막하고 오직 달빛만이 밝은 야삼경, 열두 시나 한 시경 그때 웁니다.
그 울음소리를 들어 보면 너무나 애절하고 너무나 간절합니다. 무슨 원이 있어서 무슨 한이 있어서, 모든 것이 잠든 적막한 이런 밤중에 홀로 저렇게 우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참을 울다가 또 흐느끼며 웁니다. 울다가 목에서 피가 맺히고 그 피가 올라왔다가 다시 넘어갑니다. 피 맺힌 한이 있어서 그렇게 밤새도록 웁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저 두견새와 같이 한번 해보세요. 간절하게 두견새가 우는 그 마음으로, 낭떠러지에서 밑을 바라보는 그 마음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그러한 마음으로, 생사를 걸고 선방에서 일주일, 한 달, 석 달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 하는 마음으로, 철야기도를 일주일 또는 열흘 쉬지 않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장좌불와 하는 그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배가 부르면 나태해지니까 밥을 한 끼만 먹고 그 졸음을 쫓아가면서 일일일식으로 기도하는 마음, 공부하는 마음. 그런 지극한 마음으로, 그런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한 번 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 극치가 뭐냐.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일체종지를 다 얻고, 깨쳐서 모든 것을 다, 아무 구애 없이,
고통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성인이 된다 그 말입니다. 기도해서 성인이 될 수 있는데, 하물며 돈이나 건강, 애들 입학하는 것 같은 소소한 것들은 조금만 하면 다 이뤄집니다. 그 대신 기도할 때 아주 정성을 다해서 하십시오.

그 도리를 한번 깊이깊이 참구해 보십시오.
모든 것은 다 내 마음에서 이뤄지고, 불교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꼭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구요. 사이버상에서 이곳~저곳 끼웃거리고 킁킁거리며, 그냥 무시로 들락거리지 말고, 너희들 가슴에 새기고 마음에 담아 덕목으로 삼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