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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곳간

선근 공덕



종교에 입문하게 되는 사람은 나름대로의 내면적 동기를 갖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그 계기를 일별 하여 보리심을 발하였다고 하며, 그 보리심은 깨달음의 발단이 되고 불자들이 이상으로 하는 완전한 자유 종자가 되며 궁극에는 이타의 덕성을 함양시켜 밝은 세상을 구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삼독(三毒)으로 얼룩진 무한생사의 풍랑 속에서 진정한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밝기를 헤아리기 어려운 등불을 밝히는 것이요 세간의 빛깔에 비유할 수 없는 장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무변광명과 무한 장엄자비를 계발하는 일, 이것이 참으로 보리심을 발하는 일이며 출가입신(出家入信)하는 길입니다. 삼독을 여의는 길이 출가요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 입신의 길이니 참으로 완전히 비우면 만덕(萬德)이 꽉 차게 되는 것입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는 이를 두고 이른 말입니다. 삼독을 비우고 만덕을 기르는 일은 삼학을 근본으로 합니다. 삼독의 파랑은 거칠고 끈질깁니다. 무한광명의 여래종자와 오색장엄의 본지풍광이 덮임도 이 때문, 계정혜(戒定慧) 삼학은 번뇌와 윤회의 사슬인 삼독을 끊는 보리의 방편입니다. 계를 지킨다 함은 만유불성(萬有佛性)의 종자 즉 보리심을 보호하고 증장하는 일입니다.

 

산 생명을 죽이지 않는 일 이것이 바로 불성을 기르는 일입니다. 나아가 산 생명의 선한 의지를 북돋아 주는 일 그것은 더욱더 적극적인 지계의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비희사(慈悲喜捨) 네 가지 무량한 마음으로 중생을 감싸주는 일은 바로 계학의 대승적 기초가 됩니다. 욕망으로 담을 쌓고 극도의 이기심으로 자기를 지키려는 현대산업사회에서 적극적인 지계(持戒)의 실천은 맑고 투명한 용기로 지켜나가야 합니다. 욕망이 가득한 세상 지계의 실천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선정(禪定)을 수습하는 일 또한 삼독을 제거하고 우리의 본래면목을 되찾는 일, 회광반조(回光返照)는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늘을 올려다볼 잠깐의 여유도 없이 급격하게 변하는 정보산업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세간법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유한의 조건과 욕망의 밀도를 근거로 지탱하며 또 평가합니다. 속도는 더 빠른 속도로, 욕망은 더 큰 욕망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유한한 조건에 얽매어 있는 현상을 불교에서는 유루법(有漏法)이라 합니다. 칼이 칼로써 영원한 승리를 얻지 못하듯이 욕망은 더 큰 욕망으로 이기지 못하며, 작은 시간을 큰 시간이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것은 유한한 것으로 정복할 수 없습니다. 선정을 수습하는 일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선정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초월합니다. 빠른 것을 더 빠른 속도로 보려 하는 것보다 정지된 고요함이 오히려 빠른 것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달리는 사람은 외경(外境)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조금 느린 걸음은 보다 조금 더 세상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완전하게 정지된 경우 세상은 또렷하게 보입니다. 출렁이는 호수는 풍경을 비추기는커녕 외경을 어지럽힙니다. 고요한 수면은 삼라만상을 완벽하게 비춥니다. 선정은 보지 못하는 곳까지 보게 하며 가지 못하는 곳까지 이르게 합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시간과 공간은 오히려 마음의 범주를 객관화한 조건일 뿐입니다. 선정을 수습하는 일은 정보화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마음의 빛은 그 무엇보다도 빠르며 마음의 광명은 그 어느 빛보다도 밝습니다. 지혜는 수습하기보다 발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계와 선정이 불가분의 공력을 갖듯이 선정은 지혜를 수반합니다. 마치 백촉의 등잔이 백촉의 밝기를 내듯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있어서 정 등(正等)과 정각(正覺)은 불가분의 이치입니다. 개인의 구복을 위하여 기도하거나 중생을 상해하거나 괴로움을 주면서 나만의 해탈을 위해 선정에 들려한다면 바른 선정에 들 수 없거니와 바른 지혜를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없는 깨달음은 대원력과 원행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석가세존과 모든 부처님에게는 반드시 본생담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분별의 인간 지능이 고도화되어 생명마저도 만들어내는 첨단생명공학의 시대입니다. 분별의 오류를 영원히 넘어선 선정의 수습으로 얻어진 금강반야의 대지혜광명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빛을 발해야 할 때입니다. 삼학을 수습하여 무상정등정각을 얻으신 모든 부처님은 반드시 중생을 제도합니다. 중생이 없는 부처님은 마음만 있고 몸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에 있어서 자비를 강조함은 이타의 선행이나 세간적 구제의 방편 때문만은 아닙니다. 깨달음의 완성은 반드시 자비를 수반합니다. 석가세존께서 이루신 정각의 내용 연기법은 자비의 실천이 왜 지혜의 완성인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존재함으로 인하여 저것이 있게 되며 저것이 없으므로 인하여 이것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해서 저것이 일어나게 되고 저것이 멸하므로 해서 이것이 멸하게 된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상의상존 불가분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연기의 법칙은 진보한 오늘날의 인류종교 사상사에서도 보편적이면서 탁월한 세계관으로 조망받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신심의 기초가 되는 연기의 법칙을 확고한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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