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인가?
자기의 적은 무감각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인가. “무감각입니다. 꽃을 보고도 달을 보고도 진실한 감응을 하지 못하는 무감각이 가장 큰 적입니다.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감성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축생에 가까운 무감각이 이 시대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월드컵이 열립니다. 한 골을 넣으면 모든 사람들이 짜릿한 흥분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뒤에 뭐가 있습니까.” 무감각은 인간을 물질화시킬 뿐만 아니라 폭력화시킨다. 욕망의 최대치를 끌어올린 동물적 삶의 끝은 언제나 ‘허무’를 동반한다. 현대인들의 정신적 공동화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앞선 눈 밝은 스님들은 감수성이 풍부했습니다. 대부분 사람의 죽음을 보고 출가했을 만큼 풍부한 감성을 소유했습니다. 선사들은 풍부한 감성을 최대한 끌어올려 자연과 동화되어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해 냈습니다. 깨달음을 노래한 선시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풍부한 감성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 풍부한 감성을 소유할 때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영적인 힘을 발현할 수 있다. 이 같은 변화를 담당할 주역은 바로 불교와 그 동력원인 스님이다.
업(지은 죄)은 외상도 에누리도 없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워 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중생들 사이에서 보기에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많이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간에 인간은
누구에게나 부처님의 종자인 불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 이처럼 2천6백20년 전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인류는 자비와 평등이라는 사상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우리 중생들은 한결같이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배부르고 몸편한것 입니까. 거기다가 맘도 편하면 더욱 좋고 그러나 아닙니다.
잘 산다는 것은 인간의 완성인 성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살게 해 달라”는 기도는 “어서 성불하게 해 달라”는 기도여야 한다. 어쩌면 세속과는 다른 출세간의 스님이나 하는 풀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인과를 이해하면 더 극명하게 와 닿게 될 것입니다.
흔히들 이렇게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대는 다 똑같이 이루어져 있어서 다 같아야 할 터인데 어찌해서 어떤 사람은 추악하며 어떤 사람은 현세에서 과보를 받고 어떤 사람은 후세에 가서야 과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말입니다.
그 답은 그 행위를 따라 이런 과보의 차이가 생기기 때문, 비유하자면 내가 거울을 들여다 보면 내 모습이 거울에 나타납니다. 연꽃을 거울에 비치면 연꽃이 거울에 나타납니다. 즉 거울이 그 대하는 사물의 모양에 따라 비추이는 모습이 각기 다른 것과 같다 밭에 배추씨를 뿌리면 배추가 나고 무씨를 뿌리면 무를 수확하게 되는 것 처럼, 밭에 뿌려진 씨가 각기 자각하지 못하지만 저절로 싹을 트는 것과 같습니다
업(業)의 본성도 이러합니다. 온갖 중생은 제 번뇌로 지어진 업(죄)에 의해 그 몸과 사는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 모두가 다 현세의 업 때문만은 아니며, 그 원인이 과거세에도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어서 인(因)을 짓지 않는다면 미래에 받아야 할 과(果)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우주와 인생은 모든 유정물들이 제각기 지은 업력에 의하여 각자의 환경과 그 자신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업력의 힘이 얼마나 센지 들어보시겠습니까. 지장보살님이 보현보살님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업력이란 매우 큰 것이어서, 능히 수미산을 대적하며, 능히 큰 바다 보다도 깊으며, 능히 성도(成道)의 장애가 되는 터입니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작은 악이라 해서 가볍게 알아, 죄가 없는 듯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누구나 죽은 뒤에는 과보가 있어서 아무리 미소한 것 이라도 모두 받게 마련입니다. 피를 나눈 부자 사이라 할지라도 사후에 갈 길이 각기 다르며 설사 만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과보를 대신하여 받아줄 수는 없다. 참으로 업력은 준엄하며 공평하고 철저한 것. 지은 만큼 받는 도리 외에는 달리 피할 길이 없는 게지요. 그리고 나는 어려서 큰스님께 이런 말씀을 자주 들었습니다. “업은 외상도 에누리도 없다”는 말씀 말입니다.
이것이 업인업과(業因業果)의 철칙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잇게 하는 곡식도 씨로부터 싹이 나오고, 싹으로부터 줄기와 잎을 치고 그 결과 열매가 있어서 생겨납니다.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생길 도리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업과(業果)도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상속 해 생겨나 이에 과보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좌절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 무슨 세상 사람이 얘기하는 숙명론이니 하는 것처럼 정해진 이치대로 불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찰나찰나 선과 악이 교차하여 순간순간 극락이 되었다가 지옥이 되기도 합니다. 우주만물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만 사람의 마음이 가장 변화무 쌍합니다. 선업과 악업을 무수하게 쌓으니까요.
따라서 ‘잘 사는 길’이란 인과를 믿고 인과가 무서운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고생스럽다고 해서 잘못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지금의 상황이 어떤 인연으로 초래된 것이고 그 결과 이러할 수 밖에 없겠구나 하고 헤아리는
그 생각과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라고 누차 말했지만 업력으로 인한 무거운 짊을 사찰에 와서 부처님 전에 향 올리고 피해를 줄여달라고 기도 발원 서원으로 손이 발아되도록 빌어보아야 공염불이니까, 허튼짓으로 죄(업)을 지어서 쌓아놓지 말고 참회발원으로 봉사하는 마음으로 섬김과 희생으로 그 업의숙명을 받아야 하겠지요.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었어요"
나무 석가 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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