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빠르게
덧없이 떠나가네요
가지 마라 잡고 싶은데..
빨리 걸어도 천천히 걸어도
주어진 세월의 시간은 같아요
늘 생각 속에 있는 그 사람
깊어가는 가을날, 멋진 날 되세요^)^
일체가 다 극락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문제가 발생하는 1차적 원인은 무지와 오해인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무지와 오해에 근거한 사고와 삶의 태도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그 결과는 모순과 혼란을 재생산해 내고 되풀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반야심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되는 내용은, 한마디로 모든 문제의 원인은 무지와 오해에서부터 시작하고 있기에 무지와 오해를 풀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제일 첫 구절에서는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으로 말합니다. 오온이 텅 비어 있음을 꿰뚫어 보면 일체 고난과 액난에 소멸된다는 내용이지요.
전도 몽상’을 다 떨쳐내면 곧 ‘구경열반’이라는 표현은 무지와 오해를 바로잡고 깨우침으로써 우리가 희망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천만, 이천만 불교도라고 하지만 이것이 제대로 된 신도의 숫자라면 적어도 한국불교의 위상과 이미지, 역할이 오늘과 같을 수도 없고 한국사회가 이렇게 모순과 혼란으로 소용돌이치는 사회일 리가 없습니다. 불교와 한국사회가 이렇게 추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교 구성원들이 불교를 제대로 신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알기 위한 노력이 소홀하다 보니까
불교 신앙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천만 불자는 오합지졸일(멍텅구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합지졸에서는 그 사회를 이끄는 지도적 역량이 나올 수 없습니다. 왜 부처님을 잘 알아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든 불교 사상과 정신의 뿌리, 출발점, 원천이 부처님이기에 부처님을 떠나서는 불교를 얘기할 수 없는 것이죠.
부처님 탄생게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일체개고 오당 안지’ 내지 ‘삼계 개고 아당 안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다수 불자들은 천상천하 유아독존’만 알아요. 이것만 봐도 한국불교가 얼마나 부처님 아는 일을 소홀히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라 ‘삼계 개고 아당 안지’에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한쪽만 계속 주장하며 붙잡고 달려왔습니다. 이는 곧 한국불교가 절름발이 불교였고 반쪽 불교였고 온전한 자기 모습을 갖고 역할을 해오지 못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시사하는 것입니다.
비록 반쪽이라 하더라도 탄생게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식하고 불교를 해왔는가. 역시 거기서도 그런 맹점과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관계성 연기법의 논리로 유아독존의 의미를 해석해 봅시다. 여기에 내 육신이 있어요. 육신 안에 내 생명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자아라고 얘기하고 ‘참자아·진아·불성·자성·마음·영혼’ 등을 떠올립니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할까요. 그러나 이런 것이 있다고 하면 관계성의 진리인 연기법과는 정반대 되는 논리잖아요. 이는 기독교적 이해이지 불교적 이해는 아닙니다. 한국불교는 불교의 간판을 걸어 놓은 채 내용은 기독교적인 불교를 하는 경우가 참 많아요. 이 세상에 나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나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 바로 무아 사상입니다.‘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존귀성을 강조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와 함께 오직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이 곧 나다 내 생명 아닌 것이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입니다. ‘삼계 개고 아당 안지’는 곧 자비심입니다.
탄생게는 지혜와 자비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_()()()_
역경을 통하여 부처를 이루라...!
이 거룩한 말씀은 늘 나의 마음을 흠뻑 적셔줍니다. 나날이 행복하지만은 않은 일상을 도리어 더욱 값진 행복으로 되돌려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나날이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나아가는 일상이 늘 걸림 없이 뻥 뚫리길 바랍니다. 그러다가 장애가 올 때 한없이 괴로워하고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며 때로는 크게 좌절하기도, 포기하기도 합니다.
장애가 바로 부처이며 괴로움의 경계가 바로 부처되는 경계임을 알지 못합니다. 죽기 싫어하는 우리의 마음 그러나 죽지 않는 영원한 삶을 준다고 하면 덥석 붙잡을 수 있을까요. 남들은 다 늙어 가는데 주위는 모두 변해 가는데 나만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늘 그대로 생생하다면, 그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친구들이며 사랑하는 여인이며 부모님 모두가 늙어 가는데 홀로 젊음을 즐길 수 있을까요? 오히려 늙고 죽어 가는 모습이 부러울 것입니다. 늙어 가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은 사실 자연스러운 인연의 흐름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자연스런 변화나 인연의 나타남을 ''역경''이라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마장인 것입니다. 역경의 나타남 또한 미리 지어 둔 업식의 과보일 뿐입니다. 자신이 지어 둔 악한 행위에 대한 정당 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중생의 경계에서 ''역경''은 괴로움의 대상이지만, 수행자에게 '역경'은 다스릴 재료, 수행의 재료에 불과합니다.
지어 둔 업식을 닦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인 것입니다. 이렇듯 막힌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소중한 뚫릴 기회이며, 잘 된다고 순경(順境)에 안주할 때가 가장 막히기 쉬울 때입니다. 그 마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역경도 순경이 될 수 있으며 순경도 역경이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또한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인생의 역경이 없었다면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땅히 깨침을 구하고자 하는 수행자라면 역경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마장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역경이나 마장은 부처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역경과 나를 둘로 보지 않고 내 안에서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당당히 떳떳이 맞설 수 있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역경을 미워할 필요도 없으며 가슴 아파하거나 괴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와 둘이 아니라는 동체대비심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심(嗔心)과 분심(忿心)으로 화를 내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기에 나무라는 부모의 마음처럼 그렇게 모든 분별심을 놓고 싸우는 것입니다. 역경을 견디어 보지 못한 사람은 즐거운 경계가 오더라도 바로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역경과 순경은 그 뿌리가 하나이기에 역경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자만이 순경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역경을 견디어 보지 못하면 더 큰 장애가 왔을 때 결코 이겨낼 수 없습니다. 역경을 이겨낸다는 것은 내면의 힘과 수행력을 키워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경을 맞이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수행입니다. 절하고 염불하고 독경하는 것이 소극적 수행이라면 역경과 순경을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이며 적극적 수행이요 생활 속의 수행인 것입니다. 일을 하는 중에, 수행을 하는 중에 장애가 온다면 마땅히 수행으로 돌릴 일입니다. 밖에서 오는 일체의 모든 경계 또한 실제로는 내 안에서 오는 경계이기에 나를 닦을 일이지 경계나 장애 탓으로 돌릴 일이 아닙니다.
가만히 돌아온 삶을 돌이켜 보면 어떻습니까. 괴로운 일들, 온갖 장애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어요?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모든 괴로운 일들로 인해 지금의 나는 이만큼 성숙해지고 나를 이끌어 온 소중한 공부였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경계라도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경계가 아닌 우리를 이끌어 주고, 성숙시켜 주고, 진화시켜 가려는 소중한 공부의 재료일 뿐입니다. 내가 이겨내지 못할 경계라는 것은 아예 이 세상에 있지도 않으며, 내 삶에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내 앞에 나타난 그 어떤 경계라도 그것은 내가 이겨낼 수 있고, 그 경계를 통해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소중한 공부일 뿐인 것입니다. 역경과 장애야 말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가장 큰 스승인 것이지요.
역경이나 마장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 생각처럼 어떤 실체가 있어서 우리를 괴롭히려고 찾아오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역경도 마장도 다 내 마음의 나툼일 뿐인 것입니다. 무섭다거나, 괴롭다거나 하는 그런 고정된 실체적 성품이 있어서 나를 괴롭히고 겁주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연 따라 잠시 꿈처럼, 환영처럼, 물거품처럼 우리 마음의 그림자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는 거지요. 그러니 마장이 오더라도, 귀신이 덮치더라도 그 어떤 괴로운 역경이 나를 괴롭힐지라도 결국엔 내 마음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거기에 놀아나서 휘둘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론일 뿐, 실제로 역경 속에 빠져 있을 때는 도무지 헤어나지 못할 것 같고, 도저히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을 것처럼 괴롭단 말입니다. 도저히 그 순간은 한 턱을 넘어설 길이 보이 지를 않아요. 그래서 더욱 좌절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보다 넓게 볼 수 있어야 하고, 보다 명확하게 실상을 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계속 빠져 있지 말고 그 밖으로 빠져나와 훤칠하게 넓은 시선으로 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 길은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라도 길은 있어요. 우리가 이겨내지 못할 일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공연히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경계에 빠져, 꿈같은 허깨비 놀음에 빠져 언제까지 발버둥 치고만 있을 것입니까. 나도 공하고 경계도 공하고 작용 또한 공한 것입니다.
공한 가운데 인연 따라 꿈처럼 경계가 나오니 그것을 가지고 우리들 사람이 역경이다 순경이다 분별을 해서 스스로 빠지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턱 놓고 가면 꿈을 깰 수 있습니다. 공연히 경계에 놀아나지 않고도 시원스레 갈 수 있어요. 본래 자리 자성 부처님 굳은 중심을 잡고자 놓아버리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아갈 일입니다. 역경과 장애를 능히 이겨내면 법왕의 큰 보배를 얻게 되나니, 역경을 통하여 부처를 이룰지로다라고 했습니다.
역경과 장애를 능히 이겨내었을 때 그 경계가 소중한 깨달음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역경을 도리어 부처님의 큰 보배로 돌이킬 수 있는 것이지요. 역경을 통해서 부처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마냥 기쁘고 즐거운 순경 속에 도리어 마장은 터를 잡고 앉는 것입니다. 순일하게 일이 잘 풀려 나갈 때를 조심하고, 역경으로 힘겹고 어려울 때 도리어 당당하게 나아갈 일입니다.
이상에서 설명한 보왕삼매론의 10가지 가르침은 일상에서의 온갖 장애와 역경을
닦을 수 있는 참 좋은 수행 문입니다. 늘 가까지 지녀 읽고 외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 깊이 새겨 보세요 감사합니다, 는 늘 가까이 읽고 배우세요
'렌즈 속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晩秋 (1) | 2024.10.27 |
---|---|
장엄하게 펄처진 진 대자연의 보물들... (3) | 2024.10.25 |
세월과 함께한 아름다운 스케치 (2) | 2024.10.18 |
_()_ (2) | 2024.10.13 |
들녁 수채화 그림 (1) | 2024.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