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없고 너도 없고!!!
이제는 '내가 너를 통해서 기쁨을 얻었다'라는 의미가 아니고,
'삶이 기쁨 그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어느 순간 보니까 산과 내가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고,
산이 봄과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고,
봄 속에서 느껴지는 사계의 전체의 기운과
나의 기운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것의 경험을 지(智)라고 하며,
우리 삶의 닫힌 마음을 여는 순간입니다.
여는 순간 지(智)에는 능소(能所)가 없습니다〔無我〕.
이때에 유식에 주(住)한다고 하며 식장(識場)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식(識)이라고 하는 말의 근본은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 된 앎의 장입니다.
그런데 이 앎이 있기까지는 '내가 너를 안다,
내가 추움을 안다, 내가 더움을 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더울 때는 더위 그 자체가 되고,
추울 때는 추위 그 자체가 되고,
기쁠 때는 기쁨 그 자체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내가 없고
〔無我〕 대상이 없고〔無境〕 오직 앎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선지식께서 "더운 여름이면 더위가 돼라,
추우면 추위가 돼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나와 대상으로 세웠던 과거의 어떤 분별력에서 벗어나,
'항상 현재인 삶의 흐름을 회복했다'는 것입니다〔唯識無境〕.
우리는 현재의 흐름 속에 있는 열린 삶을 보지 못하고
과거부터 흘러왔던 삶의 여력만을 통해서 자기와 대상을 보기 때문에,
지금 흘러가고 있는 열린 삶을 놓치게 됩니다.
지속적으로 관찰하다 보면 관찰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관찰이 되면서, 한 생각이 일어나고 한 동작이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바로 여기에서 진실한 삶으로 가게 하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 순간에 분별을 떠나 하나 된 앎의 장에 살아 있음을 '유식에 주한다'라고 합니다〔爾時住唯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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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자비가 바로 부처!!!
내 주변에 생기는 어려움, 역경, 시련은 누구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즉 밖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신과 같은 존재가 있어서 “너희들은 전쟁을 하라”라고 시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공업입니다. 모든 고난과 시련은 공업 결과, 우리가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한다고 했을 때 그 부처님은 인격체가 아닙니다. 자비와 지혜는 부처님을 떠받치는 두 기둥입니다. 자비가 곧 지혜이고 지혜가 곧 부처님입니다. 위신력 그 자체입니다.
인격적인 대상이 아닌 지혜와 자비, 그리고 위신력 그대로 곧 부처님입니다. 감각과 인식, 지식과 생각으로 알아지는 인격적인 부처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유로서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혜와 자비로서의 부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감각, 인식을 벗어나 있는 부처님은 쉽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마치 허공처럼 생긴 지혜와 자비를 부처님이라 느끼고 믿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부처님을 믿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다 준다 해도 이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는 용기와 결단.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조성할 때 우리 조상들은 바로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위신력, 본래 지혜인 부처님, 본래 역경과 시련이 없는 그 부처님을 믿고 온 국민들이 일심으로 단합해 부처님의 말씀을 새긴 것입니다. 그 말씀을 새기며 국난을 극복한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베푸는 마음이 우선돼야 합니다. 부처님 자체가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 줍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새가 지저귀면 나에게 기쁨을 줍니다. 강물이 편안히 흘러감으로써 나에게 넉넉함을 주고 바람이 불어서 시원함을 줍니다. 자연은 무엇인가를 끝없이 주고 있습니다. 꽃은 피어서 꿀을 벌이나 나비에게 주고, 성장하고, 죽으면 거름이 됩니다. 모든 생명들이 서로를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를 살리고 있습니다. 내 몸, 또는 무엇인가를 줌으로써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한없이 넉넉하고 편안한 마음입니다. 기쁨의 마음, 자비심, 자연이 주는 이 자비를 느끼고 온 천지에 자비가 가득함을 느끼게 될 때, 스스로가 또한 그렇게 돼야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면 불교를 아무리 믿어도 부처님의 자리에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을 믿어야겠다고 했으면 이 베푸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마음이 부처님에게 가까워지는 최초의 마음입니다. 그다음은 내가 바라는 모든 소망이 반드시 이뤄진다는 철두철미한 믿음입니다. 단 내 소망은 착한 소망이어야 합니다. 다른 존재를 해코지하는 소망이 아닌 모든 존재를 살리는 소망이어야 합니다. ‘이건 안 될 거야’라는 생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상식과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그런 존재입니다. 반드시 이뤄진다는 굳센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주변은 점점 변해갑니다. 역경이 순경으로 서서히 바뀝니다. 그럴 때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좋아집니다. 탐욕심을 제거하고 부처님의 생각에 부합했을 때, 모든 것이 이뤄지는 평안이 찾아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이 극락이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망상,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내 생명이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이라는 진리를 믿지 못하고 ‘나는 범부 중생’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곧 망상이며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이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손가락에 붙어있는 혹과 같아 떼어버리면 됩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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