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돕는 연습을 하라
온 정신 다하여 이놈을 잡았으나 힘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
어느 때는 고원 위에 올라갔다가 어느 때는 구름 속에 들어가누나.
본성은 공(空)하고 일정한 모양이 없음을 알아챘지만,
아직도 과거의 습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습기(習氣)는 말 그대로 습관적인 기운이기 때문이다.
탐욕이 많거나 성질을 잘 내거나 뜨문뜨문한 성품은 금생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과거 여러 생을 걸쳐서 연습하고 또 연습해 온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품이 공함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습기가 금방 사라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따라서 습관적 기운을 바꾸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가운데 첫째는 탐욕을 다스리는 것이다.
탐욕이야말로 삼독 가운데서도 으뜸이며, 결국 탐욕으로 말미암아 성냄과 어리석음까지 생겨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탐욕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일단 지나친 욕심을 참회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탐욕은 베풂으로써 다스려야 한다.
받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받는 마음 연습하면 거지종이 되고, 주는 마음 연습하면 부자주인이 된다.
어떤 마음을 연습할 것인가?
받는 마음 연습하면 ‘거지 종’ 주는 마음 연습하면 ‘부자주인’ 부처님 십 대 제자 가운데
두타제일의 제자인 가섭존자는 가난한 집만 탁발하며 다녔다.
그 이유를 묻자, ‘가난한 사람들은 과거에 복을 짓지 못해 가난한 것이니,
이제라도 복을 짓게 하여야 한다’고 답했다. 가난하다고 해서 자꾸 받는 마음만 연습하다 보면
더욱더 가난해지는 것이다. 없는 가운데서 하찮은 것이라도 주는 마음을 연습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번은 가섭존자가 쓰레기더미 속에 버려지는 쌀뜨물을 받아먹으며 연명하는 병든 거지노파를 만나 탁발을 요청했다. 할 수 없이 먹다 남은 쌀뜨물을 보시한 노파는 며칠 후 이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보시의 공덕으로 도리천에 태어났다. 그 몸은 찬란한 빛을 발하는 천녀가 되었으며 가섭존자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늘 꽃을 흩뿌리며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아나율 존자의 여동생인 로히니공주는 문둥병으로 고생이 막심하였다. 전생에 질투심으로 다른 여인을 해친 과보였다. 병을 치료하려면 큰 공덕을 지으라는 권고에 따라 보시를 하여 도량 내에 공양간을 지었다. 그리고 공양간이 지어지는 동안 끊임없이 도량청소를 하였다. 이러한 공덕으로 마침내 문둥병이 낫게 되었다고 한다.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는 비결은 다름 아닌 보시에 있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남들이 나를 도와주기만 바랄 것이 아니라,
내가 남들을 도와주는 마음을 연습해야 상황이 역전된다.
그러므로 복전함에 적은 돈을 넣으며 큰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구걸하는 것보다,
그냥 이렇게 말해야 진짜 복이 되지 않을까?
동체대비!
빛깔도 모양도 냄새도 더더구나 빗장도 없는 마음의 문이 관성과 업력으로 떠다니며 제멋대로 여닫으면 그것은 범부의 용심(用心)입니다. 수행의 동력을 통해 얻은 지혜로 어디서나 자유롭게 여닫되 만물을 유익하게 하면, 그것은 바로 성인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부처님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리라고 하셨던 그 가르침 하나를 가지고 우선 자기를 단련하세요. 그것은 분수와 위치를 알고 자기 역할을 하는 것에서 이뤄집니다.
어리석은 마음 욕심 분노심을 버리시고 욕망으로부터, 아는 것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때 마음은 그 본래의 빛을 찾습니다. 언뜻 지식의 습득과 지혜의 전승과정은 그렇게 상반되고 대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혜를 바탕으로 한 유용한 지식은 다시 큰 바다에서 합류하게 되어있습니다.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음양분별이 있는 3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불법의 세계는 4차원입니다. 일즉다(一卽多)이면서 다즉일(多卽一)인 세계이지요. 예를 들어, 밤하늘의 달은 분명 무진장합니다. 누구나 어디서나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강물 속에 비친 달은 하나뿐입니다. 결국 깨달음의 세계는 생각 속에서 온 세상을 맛볼 수 있습니다. 자유자재(自由自在)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가장 극복해야 하는 것이 선악의 분별심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분별심은 극복됩니다. 원래부터 분별심이란 없는 것이니까요.
인생관을 긍정적으로 갖고 적극적인 사고를 하십시오. 이 세상은 마음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치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대상과 관계에 애착하지 말고 공평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연 따라왔다 가는 것으로 생각해야지 붙들어 매려고 하면 고통이 옵니다. 결코 고정불변의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리라 하는 것이 곧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지옥 축생 아귀 수라 인간 천상의 이 세상엔 무한한 중생이 살고 있다며 이 모든 중생들을 다스리려면 방하착(放下着)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선악(善惡)으로 나와 남을 대결시켜놓으면 미운 놈이 나타납니다. 보세요, 물이 0℃ 이하로 내려가면 얼어요 마찬가지로 미움에 집착하면 간담이 서늘하게 됩니다. 또 기뻐해보세요, 심장이 뜁니다. 분노해도 마찬가지고 생각이 많아지고 고민이 커지다 보면 비장이 다칩니다. 걱정하고 슬퍼하며 놀라고 두려워하는 등 이 같은 7정(七情)은 인간의 5장(五臟)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7정을 없애주기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이루신 깨달음의 세계는 인간 현상계 분별심을 떠난 본래 마음자리입니다. 절대적인 선인 지선(至善)의 경지이지요.
남의 얘기 같습니다만 지구촌의 영웅호걸들이 흔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해왔습니다. 그런데 실제 원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평생을 몸으로 보이신 동체대비(同體大悲) 가르침은 결국 모두 내 몸과 같은데 원수가 어디 있겠냐는 것이지요.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했는데 남을 불편하게 할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에 의지해 인연 따라 남을 유익하게 하십시오. 사랑이니 사업이니 찾기 전에 우선 내 인격과 의식구조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이 행복과 심성이 인간의 사고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사이에 늘 따르는 것이 갈등입니다. 실제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요소가운데 하나로 대인관계를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갈등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쉼 없이 크고 작게 운명처럼 닥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갈등을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는 사람살이에 적지 않은 과제가 됩니다. 결국 두 가지의 길입니다. 어떠한 경계나 대상을 따라 그대로 수순함으로써 결과와 이후의 역사를 복되게 하는 경우가 있고, 닥친 경계를 용기 있게 거스름으로써 보다 가치 있는 삶을 담보해 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됐던 이같은 결정의 과정에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특히 용기라는 덕목을 지적한 것은 수순 하지 못할 경계에서 하심으로 행동하는 경우와 거스르지 못할 경계에서 과감히 거슬러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수순해야 할 경계에서 오만하게 거스르며, 거슬러야 할 경계에 대해서는 비겁하기에 자타(自他)를 복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탐욕과 어리석음 이기심 등의 경계에서는 거스르고 남의 아픔과 불행을 자비심으로 감싸고 고통을 나누기에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한편 전법의 공덕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데, 일단 포교에 나섰을 때는 믿으라고 먼저 강요하지 마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대상으로 삼는 사람에게 우선 부처님 가르침을 찬찬히 이해시켜 가면서 그 사람 스스로 진리를 보게 하십시오. 그러면 이후 믿음은 수반되기 십상입니다. 우리 불교는 지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교육도 이러한 과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혜의 창조적 동력을 계발시키는 근본교육을 실행함으로써 행위규범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국민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봅니다. 지혜는 자유로운 정신의 바탕에서 체득됩니다.
요즘 서구산업사회 끝에 서있는 동서양 모두, 다시 이 같은 동양의 지혜의 덕목을 탐색하고 활발히 논의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만하며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법상 받기 어려운 사람몸 받고 나온 금생에 일대사 인연도리를 깨닫는 수행에 매진하시기 거듭 당부드립니다._()()()_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보다 더 나은 상태이고, 그 절대의 경지를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제시한다면, 과연 궁극의 도달점, 최상의 경지는 어떠한 것일까 그것이 명확해야 한다. 무지개나 신기루를 쫓다가 귀중한 생을 허비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불교에서는 그러한 경지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말하는데 피안(彼岸), 무상보리(無上菩提) 등이다.
그것은 모든 고통과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자재한 곳이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등 인과에 따라 받는 육도의 굴레를 벗어나 선정과 해탈, 신통명지(神通明地)에 이르는 것이다. 그 몸은 모든 세상에 나타나고 음성은 시방법계에 두루 미치며 마음과 지혜는 거리낌이 없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무한 생명으로 살게 된다.
참으로 별천지 이야기 같고 이르기 어려운 경지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회복 불능의 시련이 될 수 도 있고 전화위복의 동기가 될 수도 있다. 마음을 한번 바꾸면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그렇다. 우리가 초월적 가치에로의 지향성으로 마음 바꾸기를 끊임없이 계속한다면, 그것을 수생 동안의 과제로 생각하고 정진한다면 과연 불가능한 일이겠는가. 앞으로 계속 전개될 이야기는 이상향,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렀을 때의 마음자세다.
그것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동경할 가치가 있다고 긍정이 되면, 우리 자신의 삶이 그렇게 되도록 추구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묘한 것이 마음이다. 수미산(須彌山)을 싸고도 남을 만큼 크다가도, 때로는 바늘 하나 용납하지 않을 만큼 작아지기도 한다.
태양같이 밝다가도, 칠흑같이 어두워지기도 하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모든 곳[十方]을 온통 품을 수 있으며, 어느 때[三世] 이거나 시종 관철할 수도 있다. 잘 운용하면 부처님도 될 수 있고, 나쁘게 쓰면 흉악한 죄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조화가 끝없이 펼쳐지면서도 신비하여 예측하기 어려운 것[神秘難測신비난측], 이러한 마음의 정체가 무엇이고, 그 생멸의 근본이 무엇일까? 중생들이야 의문만 더해갈 뿐 해답이 묘연하다. 마음은 예측하기 어려운 장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작용에 우리들은 또 얼마나 이끌리고 있는가?
어떤 사람과는 마냥 함께 있어도 좋은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그저 피하고만 싶어 진다.가만히 앉아서도 망망대해의 푸른 파도소리를 듣기도 하고 심산유곡의 정상에 가 있기도 한다.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고, 고향이 그리우며, 지위와 명예욕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도 마음이다. 때 없이 절대 고도에 혼자 남겨진 듯하기도 하고, 마치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 기라도 한 것인 양 뿌듯해질 때도 있다. 찰나에도 지고(至高)한 선업(善業)을 짓는가 하면 세기의 파렴치한이 되게도 하는 것이 또한 마음이다. 실상은 언제나 한결같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음이 더러운 까닭에 중생이 더럽고 마음이 깨끗한 까닭에 중생이 깨끗하다. 마치 화가가 하얀 바탕의 종이에 갖가지 색을 칠하여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내듯이 마음도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오온(五蘊)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생사의 사슬에 묶이고오온에 대한실(實) 다움으로 하여 해탈을 얻는다.
그렇듯이 우리들의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몸뚱이가 소중한 만큼 우리에게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마음을 항상 가꾸고 다듬고 청결하게 간수하여 일체의 중생을 사랑하고 바른 진리를 깨우치는 대도(大道)에 주저 없이 동참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대도를 이룬 사람을 깨달은 자, 각자(覺者)라고 한다. 그러면 중생과 부처님이 둘이 아니고 미혹함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고 했으니 우리도 부처님, 즉 각자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부처님은 부처님이라 하겠지만,
미혹한 중생은 번뇌와 망상 속에 묻혀 사는 어두운 부처님이라 할 것이다. 광석을 뽑아내듯이, 우리들도 광석이 거쳐야 하는 제련과정을 요하는 부처님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6년 동안 갈고닦은 고행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얻었고, 신과 인간의 경지를 초월하셨기에 더러운 때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부처님이 된 것이다.
제련과정을 소홀히 하고 게을리하는 사람은 부처님이 될 수 없다.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는 심즉시불(心卽是佛)의 경지도 제련과정 없이 그대로 마음에 받아 들어서는 안 된다. 요즈음의 세태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경구가 절실하게 가슴에 와닿는 것은 제련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는 부처님이 곳곳에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을 잘 가꾸고 다루는 사람에게 부처님, 보살, 현인, 위인이라는 칭호를 붙여 부른다. 그렇지 못하고 마음이 삐뚤어져 엉뚱한 방향으로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악당, 죄인, 폭군이라 한다. 이 또한 마음이 부리는 조화이다.
사람이 바른 마음을 쓸 줄 알면 신들도 기뻐할 것이다. 마음을 잘 다스리고 조절하여 부드럽고 순하게 가지라.마음 가는 대로 따라가서는 안된다. 마음이 하늘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며 귀신이나 축생,혹은 지옥까지도 만든다. 그러니까 마음을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돼라. 그러면 보살의 마음은 어떠한 것인가?
보살의 마음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 즉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대표한다.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마음이다. 사무량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무량심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부끄러움을 알고, 나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말이 부드러워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스스로 착한 행(行)을 하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지나치지 아니하고 실책을 범하지 않고, 자비를 널리 베풀어 펼치는 마음이다. 그리고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은 모든 중생의 고통을 없애고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중생에게 행복을 주는 자비가 몸과 말과 뜻의 삼업에 두루 통하여있는 것이니, 이 평등의 조건은 마음뿐 아니라 몸과 말로 써도 충분히 그 진의를 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자(慈)는 사랑이다. 자식에 대한 모정이나, 부부 사이의 사랑이나, 연인들 사이의 사랑이 아니다. 끝이 없는 광대무변한 인연의 사랑이다. 어찌 불보살의 한없는 사랑을 감정의 틀로 재량 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커다란 맹서의 사랑이며, 고통을 여의고 최상의 기쁨음을 얻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대원력(大願力)에서 풍기는 덕심(德心)의 그늘이다. 보살은 사랑은 중생의 고뇌와 번뇌를 제거하는 사랑이요, 생사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사랑이며, 또한 중생에게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길을 열어주여 해탈과 열반의 저 언덕(彼岸)으로 중생을 인도하는 진정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곧 보살의 대자비이다.
비(悲)는 또한 일체중생을 가엾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三毒)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을 가련하게 생각하여 대해탈문(大解脫門)을 열고, 네 가지 큰 바람[四弘誓願사홍서원]의 실천을 쉴 사이 없이 행하는 것이 보살의 대비행(大悲行)이다. 희(喜)는 기뻐하는 마음이다.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 환희심으로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과 불평에 사로잡혀 있는 중생들에게 환희안락(歡喜安樂)하게 하는 것이 보살의 대희심(大喜心)이다.
사(捨)는 오욕탐진(五慾貪嗔)과 번뇌망상을 버리자는 뜻이요, 나의 모든 것을 버려서 베푸는 보시행(報施行)에 아낌을 두지 말자는 뜻이다. 중생을 위하여서 무엇이든 버릴 수 있는 정신이 곧 보살의 대사심(大捨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욕에 찌든 마음을 부지런히 갈고닦으면서, 보배로운 보살의 마음 씀씀이의 도리를 본받아 부처님이 중생 제도하는 참된 길을 밟아야 한다.
_()()()_
나무 석가 모니불_()()()_
'렌즈 속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꽃~스케치 (2) | 2024.03.09 |
---|---|
雪 (沈默) (2) | 2024.01.03 |
적막강산 (2) | 2024.01.03 |
장엄하게 펼쳐진 눈 꽃 세상에서....! (3) | 2024.01.03 |
순백의 설화 스케치..... (3) | 2024.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