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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 속 세상

적막강산

 

찾아오는 이 없기에 기다리는 이 없는

법이 머무는 곳
외롭고 험한 산길을 오르면

어김없이 오롯이 앉은 산중초막을 만난다
산새 소리만 찾아드는 산중에서 다툼과 분별이 끊긴 자리
깨달음에 공덕을 구하겠다는 다짐이다

햇살 드는 법당 마루에 앉아
멀리 구름 너머를 바라보며 온 산줄기가
달려온다 해도 그저 묵언으로 정진에 하루를 보낸다._()_

 

천하 만물!

세상만사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이런 말 할 때 언하(言下)에 자기 인생을 깨닫고 부처님 뜻을 척 알고 나면,
전부 모든 물질이 진리 아닌 게 없고 모든 일이 도 아닌 게 없습니다.
도(道) 속에서 항상 생활하면서도 도(道)는 부처님이나 도(道)하고 산골 도사님이나 道(도)하는
줄 이렇게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먹을 줄 알고, 똥 눌 줄 알고, 잘 때 잘 줄 아는 이것이
바로도(道)입니다. 밥솥이 도(道)를 하루 세 번씩 일러주는 것입니다.
솥한테 부끄러운 줄 알고 미안한 줄 알면 거기에 도(道)가 있습니다.
여기 온 사람들이 다 10년, 20년 이상 30년, 50년 밥을 먹어도 밥솥한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미안한 줄도 모르는 작자가 부처님 앞에 와서 넙적넙적 절만 하면 뭐 하겠습니까?

도(道)라는 것은 부처님 뱃속에 들어가도 도(道)가 없어요.
환경과 물질과 여건에서 도(道)가 척척 나오는 겁니다.
20년 동안 걸망 메고 선방 외호(禪房外護) 하신 석암 스님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면 살 줄 아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살 줄 아느냐?
하루에 24시간, 8시간 자고 8시간 놀고 8시간 일하고 하면 24시간인데,
한 시간씩만 자기가 뭔가 인생을 한 번 돌아보는 겁니다.
사람은 20년 크고, 20년 동안 여물어지고, 사십이 넘어가면 눈썹도 하나 희어지고
머리도 하나 희어지고 이빨도 하나 흔들 해져 나사가 늘어집니다.
40대부터 늘어져 가지고 20년 내려가면 육십. 육십 내려가면 그다음 20년은 들어갈 준비 해야
천 년 만 년 살 거라고 기대 걸지 말고, 정말 몇십 년 보장할 수 있는 계약서도 없는 이 몸을
태산같이 믿고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어요!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건 생물(生物)이야!
이 생물을, 자기 생물, 몸뚱이 관리하는 법도 모르는 작자가 부처된다고 왔다 갔다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몸은 물질(物質)이야! 물질은 따뜻한 기운, 물 기운, 바람 기운,
이 세 가지가 멀어지면 끝장나는 겁니다.

그러면 염불(念佛)을 많이 하면 극락(極樂) 간다고 하지만은 죽은 뒤에 극락 가려면 반드시
내 발로 걸어 다닐 때, 내 눈으로, 두 눈으로 똑똑히 볼 때, 극락세계가 어디 있는지, 가는 길은
어느 길인지, 가긴 누가 갈 건지,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 짓지 못하고, 자기 발로 걸어 다니고
지 눈을 떠 가지고 있을 때도 못 가는 작자가 죽을 때 당황해서 천지가 아득할 때, 극락세계
간다는 것은 서울 김서방네 집 찾아가는 격입니다. 막연(漠然)하게 어디로 갈 거냐는 것입니다.
그런 공짜 염불 그만하고 뭔가 한 번 생각해봐야 될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염불 하는 것도 부처님 부르는 때도 부르는 이유가 분명히 서야 됩니다.
왜 부르는지, 무엇 때문에 부르는지, 반드시 부르면 한 번 불러서 안 나오고 두 번 불러서 안
나타나면 세 번 만에는 삼천대천세계가 둘러 꺼지게 불러 가지고 부처님을 만나 봐야 합니다.

삼천대천세계가 바깥 세계가 아니고 내 탐심(貪心), 내 진심(瞋心), 내 치심(癡心)이 다
무너지고 마음의 문이 탁 열리면 자성 극락(自性極樂) 아미타[阿彌陀] 요,
자기 성품이 바로 극락세계가 됩니다.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라, 반드시 부를 때는 만나볼
각오가, 목적과 기대와 희망이 서 가지고 척 불러서 하루 한 마디씩 불러, 3일 만에 완전히
만나보고 끝장을 내야 합니다.
시작했으면 결론이 나와야 되는데, 천 년 만 년 불러도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집에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 열 번만 계속 부르면 ‘저놈의 새끼, 왜 자꾸 쳐 부르기만
하느냐’고 작대기 들고나갈 겁니다.
부처님은 너무 착하고 점잖아서 매일 불러도 화도 안 내고 가만히 있는 것은 워낙 점잖으니
가만히 있습니다. 나부터라도 다른 할아버지라도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부르는 목적이 분명히 있어 가지고 부르면, 확실히 세 번 불러서 척 만나 놓고 보면 정말
자아[眞我]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부른다는 개념은 그렇게 불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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