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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 속 세상

장엄하게 펼쳐진 눈 꽃 세상에서....!

본래의 본질은 무일물이다!

외적인 형상은 다르더라도 본질은 하나, 그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불교이다.
부처님은 이것을 알리는 것이 가장 쉽게 행복해지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부처님 본인도 아마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완벽한 행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핵심을 바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를 돕는 데는 아주 괜찮은 비유입니다
새끼와 가마니,새끼든 가마니든 본질은 ‘짚’이다. 그 둘은 서로 다른 제품. 그런데 그 제품들의 재료는 뭡니까? 짚이죠. 제가 그렇게 강조하는 ‘공’의 핵심은 ‘짚’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제품이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제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문제로다 부부 간에도 서로 다른 제품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니 티격태격할 수밖에. 하지만, 두 제품도 ‘짚’이라는 하나의 근원은 똑같다.
이것이 바로 ‘공’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다. 수백 가지 제품이 있지만, 재료는 모두 똑같은 ‘짚’이에요.
이걸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불교이다.

정리 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나’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가 ‘공’인 줄 알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 그럼 왜 ‘공’이냐.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서로 연기법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공’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우리가 단일하게 독립돼 있지 않다는 말이야 존재들이 개별적으로 독립돼 있다고 이해하면 집착을 하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화가 생기고 존재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공’.
그럼 뭐가 중도냐. 내가 공한 줄 알고 행위하는 것, 그것은 ‘나’를 버리고 살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길. ‘나’를 버리면 내가 중도로서 존재하고 있고, 중도로서 행위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중도를 이해하면 삶이 달라진다. 중도의 사고방식은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훨씬 지혜로워질 수 있다. 우리가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중도에 있다.

마음은 인연따라 자유롭게 나타나!

본래면목이 분명하다면 선(禪)이라 하든 교(敎)라 하든, 부처라 하든 중생이라 하든, 입을 열든 입을 다물든, 앉아 움직이지 않든 서서 다니든, 생각을 하든 생각을 잊든, 깨어 있든 잠을 자든 아무 상관이 없다.
따라서 일부러 선이라 할 것도 없고 교라 할 것도 없고 부처라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 할 것도 없고 고요히 앉아 있을 것도 없고 서서 다닐 것도 없다. 오히려 선이라 하든지 교라 하든지 부처라 하든지 중생이라 하든지 구분하고
차별하여 세우고 무너뜨리고 한다면 선(禪)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선은 원래 보고 듣는 온갖 일과 온갖 행위와 온갖 생각에 착착 들어맞아서 털 끝만큼의 어긋남도 없다.
그러나 생각을 앞세워 따지고 헤아려 간다면 단 한 가지 일이나 단 한 가지 행위나 단 한 가지 생각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놓아두면 본래 옳지 않은 것이 없지만, 마음을 가지고 헤아리면 한 가지도 옳은 것이 없다.
이것을 두고 털 끝 만큼의 차이로 하늘과 땅만큼이나 벌어진다고 말하는 것이고, 털 끝 만한 것이라도 있으면
바로 티끌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번갯불도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본래면목은 언제 어디서나 조금도 부족하거나 모자라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생각을 일으켜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생각을 일으키면 상(相)을 따라 분별하고
분별하게 되면 취하고 버림이 있게 되니 가면 갈수록 더욱 어긋나기만 한다. 그러나 아무리 어긋나더라도 진실을 알고 보면 어긋남이 없다. 마치 본래 정해진 모습이 없어서 인연따라 자유롭게 모양을 바꾸는 것이 물의 본성이어서,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겨서 어떤 모양으로 변하더라도 본래의 물은 조금도 바뀜이 없이 그대로 물인 것과 같다.
만약 물이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 인연따라 바뀌는 모양에서 자신을 찾는다면 물은 결코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어서 인연 따라 자유롭게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와 같이 인연따라 나타나는 마음이 바로 우리의 의식이요 느낌이요 의지요 지식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식이나 느낌이나 의지나 지식 등 알음알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찾으려고 한다면 마치 물이 그릇의 모양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마음은 어디에든 나타나 있지만 스스로는 정해진 모습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달았으면 모든 곳에서 마음을 볼 수가 있지만, 마음을 깨닫지 못했다면 어떤 방법을 통하여
어떤 곳을 찾더라도 어디에서도 마음을 찾을 수는 없다.

인연 따라 흘러가는 ‘이것’은 흘러가지 않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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