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심안의 곳간

허망 분별의 진상

 

 

 

일상적 지식의 실상!


비록 아직은 40대 전후의 젊음에 안도하며 건강한 신체를 자부하고 있을지라도, 이전에 말한 적이 있는 이야기를 다시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것인 양 반복하게 되는 일이 잦아지는 것은 이미 정신적으로 노쇠에 접어들었다는 증거이다. 이 분명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같은 말의 반복을 말하는 당사자는 의식하지 못하고 듣는 사람이 주로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 정신적 노쇠가 덜한 편이라면, 말하고 나서라도 언젠가 했던 이야기임을 스스로 알아차리고서는 이야기할 상대를 잘 구분해야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이 같은 정신적 노쇠가 극심한 경우를 흔히 망령 들었다고 말한다. 망령이란 노년에 나타나는 정신 현상이라고들 알고 있지만, 나이와는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망령이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망령이라고 하지 않고 망상이라거나 망념이라고 칭한다. 누군가가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을 모두 망상이라고 말한다면, 누구라도 대뜸 화부터 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통 망상이라고 간주하는 것부터 되짚어 보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망상 또는 망념이란 사전에서 설명하는 대로 “있지도 않은 사실을 상상하여 마치 사실인 양 굳게 믿는 일, 또는 그러한 생각”이다. 이에 의하면 망상은 ‘사실이 아닌 것’ 즉 거짓과 통하는 말이고, 망상을 말로 표현하면 그 말은 거짓말이 된다. 그리고 사전의 설명을 원용하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을 직접 경험한 것처럼 믿거나 생각하는 것도 망상이다.
우리가 종종 빠지기 쉬운 착각은 망상을 부드럽게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남의 경험이 자기의 경험인 양 뇌리에 박혀 버리는 경우의 착각은, 착각이라는 부드러운 표현으로 허용해 줄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허구 의식을 초래한다. 예를 들어 가상의 사실을 실감 나게 표현한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는 대게 그 내용을 실제로 일어난 일인 것처럼, 떠올리기 일쑤이다. 그런데 이런 연상을 반복하다 보면 간접적인 경험인 허구의 사실과 자기가 직접 경험한 사실이 뒤섞여 버리게 된다.
소설이나 영화를 직접 읽거나 보았다면, 이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형성되는 허구 의식은 그 정도가 덜한 편이다. 그 내용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중적 간접 경험까지도 자기의 직접 경험과 뒤섞이는 허구 의식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요즘 잘 읽히는 화제의 책이 있는데,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지를 나도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책을 직접 읽지 못한 터에, 우연한 담화에서 이미 읽어 본 친구가 그 책에 대해 신뢰할 만하게 피력하는 소견을 들었다. 이제 나도 그 책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지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 책이 화제로 등장한 자리에서는 “소문난 것만큼이나 대단한 책은 아니야.”라고 운을 떼면서 나도 소견을 피력하게 된다. 화제의 책인 만큼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하다 보면, 어느 때는 자기에게 그 책에 대한 소견을 전해 준 바로 그 친구에게 그의 소견을 나의 소견인 양 천명하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연출한다. 간접 경험이 직접 경험인 양 행세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수시로 연출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얻은 지식이란 대부분이 그와 같은 식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지식은 직접 확인한 바 없는 허구 의식이며, 사전적인 의미의 망상과 다를 바 없다. 망상의 특징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알려질 수 있을 뿐, 망상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그 당사자가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이 망상임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저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모두 망상일 가능성이 있다.
인가는 망상으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선 거부감을 일으키겠지만, 소위 문명의 발전은 우리에게 망상을 부추기고 이 망상을 이용하며 정신적 즐거움을 개발하고 있다. 이 사실을 수긍한다면, 인간이 망상의 존재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망상을 활용하는 현대의 대표적인 예는 컴퓨터에 의한 ‘강상 현실’ 일 것이다. 단지 화면을 보면서 실제의 상황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듯한 효과를 얻게 하는 가상현실은, 조만간 직접 경험이라는 탈을 쓰고 또 다른 차원의 지식으로서 우리의 삶을 장악할 것이다.
『심지 관경』(心地觀經)이라는 경전에서는 망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우리의 실상을 지적하여, “망상은 먹구름과 함께 일어나는 바람처럼 생사의 숲을 불어, 생각마다 일어난다.”라고 설한다. 망상은 언제라도 졸지에 발생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일상적 지식의 실상이 위와 같다면, 지금 우리가 직접 목격하고 있는 저 물건이나 사건도 실제로는 있는 그대로가 아닌 망상의 산물이 아닐까? 만약 망상이라면, 어떠한 논리로 외부의 대상들이 엄연히 실재하는 것인 양 인식되는 것일까?

훈습과 현행!


불교에서 망상이라는 말은 망견(妄見), 망심(妄心), 망집(妄執) 등으로도 표현되고, 분별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망 분별이라는 말은 분별이 망상임을 명시한다. 망상이던 분별이던 이 둘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는 원래 ‘허망 분별’이라는 말로 표시된다. 이 말은 우리의 모든 분별이 허망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유식학에서는 우리가 빠져 있기 쉬운 허망 분별의 진상을 훈습(薰習)과 현행(現行)의 논리로써 설명한다.
현행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뢰야식의 여러 가지 명칭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현행의 근거인 아뢰야식이 존재하는 양상과 그 기능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의 마음 기능, 즉 8식(識) 중에서 제8 식인 아뢰야식을 왜 식물의 씨앗에 비유하여 아예 종자라고 부르는가?
아뢰야식을 제외한 나머지 7식의 활동 자체는 동시에 존재하는 의식의 어는 영역에 배어든다. 이때 7식의 활동 자체가 배어 든 그 영역을 아뢰야식이라고 칭한 것이다. 훈습이란 그렇게 배어드는 작용을 일컫는 말이며, 우리의 경험이 마음의 깊은 층에 인상 지워지는 것을 뜻한다. 이리하여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이루어진 기운을 습기(習氣)라고 한다. 이 습기는 장래 그것을 배어들게 한 원래의 식 활동 자체를 다시 산출하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이 원인이 되는 바를 지목하여 습기를 종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뢰야식이란 7식의 활동이 훈습됨으로써(배어듦으로써) 존속하는 습기의 집합이며, 이는 다시 발동할 잠복 상태로 있기 때문에 종자라고 불린다. 이 종자는 과거의 경험이 잠복된 상태로 있다가 미래의 경험의 원인이 됨을 의미한다.
아뢰야식은 마치 전에 이루어진 모든 의식 활동의 정보가 습기로서 저장되어 있는 창고와 같다. 아뢰야식을 흔히 장식(藏識)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머지 7식은 끊임없이 종자로부터 전변 하면서 활동하므로 전식(轉識)이라고 불린다. 중국의 유식 학자들은 그 저장의 기능을 세 가지 측면으로 이해하여, 그 기능을 각각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능장이란 모든 습기 즉 종자를 간직하는 기능을 일컫는다. 창고(藏)의 기능이 물품을 보관하는 것이듯이, 아뢰야식은 모든 종자를 보관하여 간직한다는 것이다.
소장이란 훈습되는 모든 의식 활동을 받아들이는 기능을 일컫는다. 창고는 새로이 물품을 받아들이는 곳을 가리키듯이, 아뢰야식은 습기로서 훈습되는 모든 의식 활동을 받아들이는 장소라는 것이다.
집장이란 제7 식인 말나식에 의해 집착되는 기능을 일컫는다. 창고가 그 소유자에게는 도둑맞지나 않을까 타버리지나 않을까 하며 염려하고 집착하는 대상이 되듯이. 아뢰야식은 말나식에게 집착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훈습은 아뢰야식의 존재를 상정하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현행은 이 훈습에 대응하는 말이다. 훈습이란 아뢰야식 이외의 모든 의식, 즉 7식이 활동함으로써 그 결과로써 이루어지는 작용임에 대해, 그 7식이 현재 생기하여 활동하는 것을 현행이라고 일컫는다. 이에 따르면 현행에 의해 훈습이 있고, 이 훈습에 의해 잠복된 습기 즉 종자가 원인이 되어 장래의 경험인 의식 활동을 일으킨다. 이 과정은 선후와 시종(始終)이 없이 계속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행은 종자를 아뢰야식에 훈습하고, 종자는 현행을 일으키는 셈이 된다. 유식학에서는 이 두 가지의 관계를 각각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종자 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작용은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우리의 의식 활동은 순간마다 변하고 있다. 이 무상한 의식 활동을 불교에서는 찰나멸이라고 표현한다. 습기 즉 종자도 찰나멸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점에서 그 두 가지 작용은 시간적 차이를 구분할 수 없으므로 같은 찰나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마저 같다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습기와 새로운 습기는 그때마다의 의식 활동, 즉 현행에서 여러 가지 상황이나 조건의 영향을 받은 것이므로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둘의 발생은 동시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훈습되어 있는 모든 습기 즉 종자가 반드시 현행을 일으킨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는 과거의 경험이 모두 기억으로 떠오르지는 않는 이치와 같다. 습기는 장래의 경험을 산출해 갈 것이지만, 그것은 어떤 조건(緣)이 구비되어 무르익음으로써 다시 7식으로서 발동하고, 그 습기에 어울리는 상태의 경험을 산출한다. 유식학에서는 이 같은 경우에 대해서 설명하길, 현행하지 않는 종자, 그리고 새롭게 훈습된 종자도 다음 찰나의 아뢰야식에 스스로 같은 종자를 낳는다고 한다. 말하자면 경험한 그대로의 정보를 다음 찰나에 전하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종자 생 종자(種子生種子)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종자와 현행은 종자생현행, 현행훈 종자, 종자 생 종자라는 세 가지의 방식으로 우리의 경험 세계를 형성한다. 유식의 8식 중에서 아뢰야식이 종자의 기능으로 작용하고 나머지 7식은 현행의 기능으로 작용한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종자를 고정관념, 현행을 사고 활동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이 경우에 고정관념이 어떤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종자 생현행이고, 어떤 생각이 고정관념으로 잠복되는 것은 현행훈 종자이며, 고정관념이 또 다른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것은 종자 생종자이다.
이상의 요점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7식의 활동은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종자 즉 습기를 형성한다. 아뢰야식은 그 종자를 보관하고, 종자는 온갖 조건에 따라 현행, 즉 7식의 활동으로 발아하여 개화한다. 우리가 의식과는 별개로 외부에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와 같은 방식, 즉 ‘종자 생현행’ ‘현행훈 종자’ ‘종자 생 종자’라는 세 가지 방식에 의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모든 것은 이처럼 훈습된 종자와 활동하는 현행, 즉 아뢰야식과 7식이 서로를 매기로 삼아 만남으로써 의식 활동과는 독립된 개체인 양 상속해 간다고 유식학에서는 설명한다.
외부의 사물이 우리의 의식 활동과는 관계없이 별개의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알고 있는 것은, 간접적인 경험을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인 양 혼동하거나, 그것을 지식으로 삼아 다른 분별을 반복하는 일상적인 망상과 다를 바 없다. 유식학은 범부인 우리가 진실인 양 고수하고 있는 지식이 허망 분별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는 이론을 제시한다. 이는 곧 범부가 빠져 있기 쉬운 허망 분별의 진상을 밝히는 이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