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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비록 적게 가졌어도 나눌줄 알아야 보살”


-염불은 부처님 만나려는 수행 불·보살 명호 마음에 채우면 일체 사량분별 끊어집니다

이곳 산 골짜기에도 이른 아침마다 맑고 투명한 새들의 노랫소리가 한결 정겹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경제 한파로 얼어붙은 중생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봄이 오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때일수록 많이 가진 이들이 적게 가진 사람들을 돌보며 지켜주는 보살행을 펼쳐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가족의 생계유지에 빠듯하고 여유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받아들여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온정을 베푸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펼치는 보살행의 근원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그 힘은 의외로 소박한 곳에서 나옵니다.

우리들의 번뇌가 고통에서 나오듯 보살행도 고통에서 시작됩니다. 도저히 못 견딜 정도의 쓰라린 고통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나야 되겠다는 강력한 욕구가 바로 보살행 실천의 출발점입니다. 보살행의 원천은 책에 있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우리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 바꾸어 말해서 그 삶 속에서 겪는 무한한 고통이야말로 보살행의 동력인 것입니다. 사실 고통은 우리에게 한(恨)을 줍니다. 특히 그 고통이 타의로 생긴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고 말씀하신 분노와 진심, 개인적인 복수심이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 한이야말로 보살행을 발심하게 되는 동기가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한이라는 놈은 중생에게는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전환되고 보살에게는 서원으로 바뀌어진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똑같은 원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지 혹자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자신이 아픔을 겪으면서 이제까지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돌이켜 생각하고 이제 다시는 이런 아픔이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마음을 낼 때는 한이 서원으로 변화됩니다. 자기가 겪는 고통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욕구에만 빠져 있는 것이 중생의 모습입니다.
반면, 자기가 겪는 고통에서 나와 같은 고통으로 아파하는 다른 사람이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고 자기 아픔을 해결하려는 바람 이상으로 타인의 고통도 해결하려는 의지를 갖게 될 때는 서원으로 전환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아픔의 극복을 개인적인 한으로 끝나지 않고, 한(恨)의 사회화로 승화하는 그 밑바탕은 바로 더 아픈 사람의 처지에 서서 그들과 함께 해결하려는 마음, 즉 보살의 서원인 것입니다.

나도 가끔 보살행을 잘 실천하고 살았는지 내 자신에게 되묻곤 합니다만 그때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렇게 푸른 옷을 입고 속절없는 세월만 축내고 흘렀습니다. 강산이 벌써 쉰여덜번이나 바뀔 정도로 긴 세월입니다.

대세지보살은 염불 하는 중생을 극락정토에 태어나도록 큰 용맹심을 일으켜 주는 보살이지요.
“부처님을 기억하고 부처님을 염한다면 현생에나 내생에 틀림없이 부처님을 볼 것이며,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해 어려운 방편을 빌리지 않아도 스스로 참마음이 열리니, 향수를 바른 사람의 몸에 향기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라고 말했지요. 이 말은 염불 수행의 특징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주 잘 나타낸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만나는 것, 이는 우리 모든 불자들이 신명을 바쳐 추구해야 할 과제이며 성취해야 할 목표입니다.

일체처 일체시(一切處 一切時)에 어떤 사람이 지장보살을 놓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밥을 먹어도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지장보살이 먹는 것이고 잠을 자도 내가 자는 것이 아니라 ‘지장보살’이 자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모습은 눈이나 귀를 통해 볼 수 있는 감각적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마음 안에서 드러나는 깨달음의 큰 지혜 광명이며 자비이지요.
그래서 참되게 염불 하는 사람은 절대로 요행스런 기적이나 신통 등 외형적 가피를 구하지 않습니다.
돈 생각이나 복을 받으려는 생각보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절실하고 간절하다면 부처님은 불자들 앞에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 열심히 염불 하십시오. 부처님 말씀대로 따르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염불도 열심히 해야 되지만 결국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내 아픔으로 여길 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고 할 때 상대가 느끼는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며 상대의 편에 서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경우 자기 생각에 맞춰 행동하기 쉽습니다. 즉 중생은 자기중심에 집착해 자기 생각대로 상대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래서 상대방은 자신에게 단순한 구제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기도 하지요. 만약 이와 같은 형태로 구제를 행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지배 형태를 가져오는 데에 불과합니다. 그건 안됩니다. 아픔은 훨씬 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베푸는 행위는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랑에 비하면 좁은 사랑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아픔을 기반으로 한 사랑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아픔을 겪거나 그렇지 않으면 타인의 아픔을 마치 자기가 겪은 아픔처럼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지요.

‘저런 처지에서 얼마나 아프겠느냐, 내가 여유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데 참 미안하다’는 마음만 있으면 설령 도와주지 못해도 무량한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꼭 재물로만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재정 형편이 안될 때는 마음이라도 함께 아파하며, 도와주지 못하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으면 족합니다.
그것이 바로 큰 수행자인 것입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