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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나무에 구멍을 뚫듯이

 

딱따구리가 나무에 구멍을 뚫듯이 그렇게…. “내 속에서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할 인과로서의 업이 자꾸 나오는데 나오는 대로 놓고 놓아서 놓는 것마저도 없다 할 때까지 놓아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게 공했다더라’하면서 놓으면 그냥 공으로 빠져 몰아지지를 않는다. 그러기에 공도 아니고 색도 아닌 데서 주인공 하나를 세워 놓고 전부를 주인공으로 몰고 들어가라고 한 것이다. 빠져나갈 틈이 없이 몰고 들어가는 게 몰락 놓는 것이다.

그렇게 몰다 보면 마치 젖을 쥐어짜서 유선이 터지게 하듯이 답답해져서 빠져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는 쑥 빠지고 모는 그것만 남게 몰아붙여라. 그렇게 몰다보면 참나가 나온다. 바퀴가 구르려면 중심축이 잡혀 있어야 한다 . 맷돌도 정중앙에 심봉이 딱 꽂혀 있어야 곡식을 갈아낼 수 있다.

다가오는 일체 경계를 방하착 하라니까 그냥 ‘무라, 무라’. 하고 만다면 심봉이 내 안에 중심을 하나 딱 세워 놓고 일체 경계를 그리로 몰아 놓고 들어가야 한다. ‘주인공! 네몫이잖아.’하며 ‘나’라는 주체의식을 포기하고 일체를 거기에 맡길 때 비로소 방하착은 시작된다. 놓으라고 하니까 이렇게 하는 건가? 저렇게 하는 게 맞는가? 하고 머리를 굴리려 한다면 그건 방하착이 아니라 사량 분별일 뿐이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 소득이 없다. 허공에다 대고 주먹질하는 꼴이라 끝내 물 맛을 볼 수 없게 된다. 이왕 놓고 갈 양이면 사량 분별까지도 놓고 가야 한다.

이게 맞나 저게 옳나하는 그것까지도 주인공 몫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작은 의정이 큰 의정이 되고 큰 의정이 나를 압도하면서 마침내 물꼬가 터지는 계기를 맞게 된다. 화살을 쏠 때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기까지 많은 연습을 해야 하듯이 놓고 가는데도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 그냥 다 놓고 산다는 다짐만으론 어림도 없다. 찰나찰나 다가오는 안팎의 경계에서 즉각적으로 주인공! 할 수 있어야 활 쏘기가 제대로 되기 시작한다. 마침내 정중앙을 관통하기까지 거듭거듭 놓는 연습을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바깥 경계에 끄달리며 살아왔다. 보는 것 듣는 것, 접촉하는 일체 경계마다 사량하고 분별하면서 희로애락의 잔치를 벌여온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시선을 안으로 돌려 주인공 자리에 놓고 맡긴다면 오욕칠정의 주체인 ‘나’가 발 붙일 곳을 잃게 되기 때문에 마음은 점차 평안해지고 번뇌의 물결은 잦아들게 된다.

자꾸 밖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안으로 돌려놓는 ‘U턴’ 작업을 해 보자. ‘주인공, 너 만이 할 수 있어!’라든가 ‘주인공, 네 몫이니 네가 해결해!’ 하면서, 그러면 ‘나’는 절로 빠지게 된다. ‘나’가 빠져야 진정으로 ‘놓고 맡김’이 이뤄진다.

딱따구리가 나무속에 박힌 벌레를 파먹을 때 어떻게 하던가? 주둥이로 한 자리를 계속 쪼아 마침내 구멍을 내고 벌레를 파 먹게 된다. 놓고 간다는 것도 그와 같다. 내 속 깊은 곳에 참나가 있다는 생각에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듯이 계속 쪼아대야 한다.

‘어디 주인공이 있다면 모습을 드러내라’ 또는 ‘참 나가 있다는데 얼굴 좀 보자’ 하는 식으로 몰고 들어가야 한다. 놓고 맡김은 결국 참 나를 발견키 위함이니 그 길 말고는 달리 묘책이 없지 않겠는가. 몰고 들어 갈 때는 사무치는 마음이어야 한다. 건성이어서도 안되고 뜨뜬 미지근해서도 안된다. 돌에 피가 배일 정도로 사무쳐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못 보아서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듯이 그렇게 그리워해야 한다.

툭 툭 건드려 보는 정도로는 구멍을 낼 수 없다 젖 먹던 힘까지 다 기울여서 몰아쳐야만 반응이 온다. 놓고 가는데도 맛을 볼 수 없다는 의심이 들거든 그것까지도 밀어 넣어라. 나오는 족족, 닥아오는 족족, 놓고 또 놓을 때 어느 날 소식이 온다 물꼬가 터 생수가 샘솟듯 용출하게 된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