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찰에 가보면 팔상전(八相殿)이라는 법당이 있습니다. ‘상’이란 글자는 ‘서로 상(相)’자로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여덟 가지 과정을 그림으로 그려 모시는 법당을 팔상전이라 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과정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이 팔상도입니다. 그중 첫 번째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입니다. 도솔천은 삼계 중생세계에 속합니다. 중생세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로 나누어집니다. 그 가운데서도 욕계에 육천이 있는데 육천 중의 하나가 도솔천입니다. 그곳은 중생세계이지만 모두가 자비심을 가지고 공덕을 닦는 곳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성불하시기 전에 도솔천에서 공덕을 닦으셨습니다. 선행에 따라 선혜보살, 호명보살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며 보살행을 다 닦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바세계 중생을 제도하시고자 인간세계에 화생 하는 광경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도솔래의 라고 합니다. 도솔천은 미륵보살이 계시는 곳으로 만족을 알고 자비를 실천하는 곳입니다. 부처님은 도솔천에서 선행을 닦으셔서 보살도를 이루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사바세계의 중생을 제도하고자 원을 세워서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명호에서 ‘석가’는 ‘능인’으로 모든 것을 다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격의 최고를 의미합니다. ‘모니’는 ‘적묵’으로 침묵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구하는 게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구하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 침묵하지 못하는가하면 마음속에 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공덕을 다 지었고, 만족하여 스스로 구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는 분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은 구하는 행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중생은 구하는 욕구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구해도 구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구하는 행위입니다. 평생을 구해도 또 구합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구하는 게 감옥이고, 구하는 게 바로 지옥이며, 구하는 게 고통입니다. 고통은 어디에서 오느냐 하면 구하는 마음 때문에 생깁니다. 또한 고통은 형상과 시간에서 옵니다. 형상과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고 성불입니다.
생각해 보면 즐거웠고 괴로웠던 일들이 전부 눈에 보이는 것처럼 기억으로 떠오릅니다. 그렇지만 과거에 내가 보았던 것이 지금 있느냐 하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무상이라고 합니다. 형상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연못을 보면 달그림자 해 그림자가 있는데 연못 속에는 달과 해가 없습니다. 거울을 보지만 거울 안에 사람이 없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데 정말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형상을 모르고, 또 시간이 없는 것을 모릅니다.
나 내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은 내 마음을 돌이켜보는 길에 있습니다. 이것을 명상이라 하고 참선이라고도 하는데, 원리는 반조(返照)입니다. 돌아보는 겁니다. 며느리가 미워 죽겠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돌이켜 보는 것이 약하면 미워하는 마음이 남아있고, 깊어지면 점점 줄어듭니다. 아주 깊으면 허공과 같이 다 없어집니다. 미워하는 마음만 없어지면 며느리를 보아도 밉지 않습니다. 이게 부처님이 하신 방법이고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입니다. 기도도 이와 같습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참선이 뭡니까. 자기 마음을 돌이켜 보는 것이 참선 아닙니까. 모든 문제의 해결방법은 내 마음을 돌아보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돌이켜 보는 공부, 반조공부라고 합니다. 모든 고통은 자기 생각에서 나오니까 생각을 돌아보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생각 하나가 맑아지면 모든 것이 맑아집니다. 기도를 잘하면 잘못된 생각이 없어집니다. 인간은 누구에게 속느냐 하면 자기 생각한테 평생 속습니다. 생각을 허공처럼 비우는 것을 도(道) 닦는다고 합니다. 생각이 비워지면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구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고, 구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면 무한한 공덕을 무한히 닦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배워야하는 것이 만족입니다. 하나를 가지고 만족하면 하나도 많은 것이고, 억만 개를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면 그것은 적은 것입니다. 그러니 만족할 줄 알면서 구함 없이 선행하는 것이 성불의 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구하기만 했지 만족은 한순간도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만족을 배워야 합니다. 부처님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만족했습니다. 죽음을 거부하면 고통이지만 죽음에 만족하면 고통이 아니라 열반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느냐 만족하느냐 여기에 열쇠가 있습니다. 이러한 부처님 이야기가 경전에만 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틀림없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심과 발심입니다. 신심과 발심이 되어야 우리 생각의 구조를 바꿀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에게는 모자란 것이 없습니다.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보세요. 다만 우리 스스로 허망된 생각 때문에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도, 참선, 독경을 통해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허망된 생각을 줄여나가야 합니다. 마음이 안정되면 늘 만족하며 공덕을 지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점점 더 공덕이 넓어져서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부처님 세계가 곧 우리 세계가 되도록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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