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의 눈’을 얻는 세 가지 길 심안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는 ‘믿음을 바탕으로 발심하는 것’, 우리 모두는 본래 심안이 열려 있는 ‘ 완전구족자[完全具足者]’라는 믿음을 가지세요. 우리 모두는 심안을 가지고 있지만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듯이 업식이 잠시 심안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믿음의 토대 위에 ‘願’을 세우는 것이 발심입니다. 중생은 업력에 끌려 살지만 보살은 스스로 세운 원력으로 살지요. 원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원동력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전생에 세운 원에 의해서 생사해탈의 대각을 이루셨고, 법장비구는 48 대원을 세워 아미타불이 되셨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유명한 과학자 뉴턴은 원에 의해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고, 에디슨은 전기를 발명했어요.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발견과 발명은 원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뤄낼 수가 없습니다.
거창한 원이 아니더라도 지금 있는 자리에서 자기 그릇대로 마음 낼 수 있는 원을 세우면 됩니다. 원은 만물을 창조하고 성취하는 에너지이고 원동력입니다. 무언가를 이뤄달라고 비는 타력의 원이 아니라 스스로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자력의 원이기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 해도 원을 세워 끊임없이 실천하지 않는 삶은, 좀 듣기 거북할 수도 있겠지만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때가 되면 짝짓기 하는 축생의 삶과 다를 바 없습니다.
두 번째]는 ‘마음공부’입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고 그것을 반복해서 하면 흔히 말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어 볼까요? 허공에는 빛이 가득하지만 그 빛으로 인해 불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 그러나 허공의 빛을 렌즈로 5분만 모으면 불이 붙습니다. 그와 같이 산란한 생각을 하나로 모아 삼매에 들면 지혜가 열립니다. 이것이 바로 삼매의 힘입니다. 공자의 논어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悅乎]아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 했습니다. 이 중에 ‘학[學]’과 ‘습[習]’에 큰 의미가 있어요. 어떤 일이든 배움과 익힘에 몰두하면 그것이 마음공부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기도· 염불·좌선·독경·주력 등의 수행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 발심을 정진의 힘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보살의 눈’을 얻는 세 번째 길은 ‘그냥 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원을 세우고 일심으로 정진하되 아무런 조건 없이, 바라거나 구하는 마음 없이, 집착이나 생색내는 마음조차 없이 그냥 하면 됩니다. 예불 때마다 천수경을 독송하다 보면 “무위심내 [無爲心內] 기비심 [起悲心]”이라는 구절을 만나실 겁니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요? 한 바가 없는 마음에서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 그대로가 보살의 삶입니다. 수행이든 일이든 무엇을 할 때는 ‘그냥’ 하는 마음, 무위심으로 하고 나서 “원만 성취하여지이다. 스바하.”라고 축원하면 됩니다. 이것이 무연자비[無緣慈悲]의 행입니다. 모든 공덕을 조건 없이 나누는 이 마음을 지니고 산다면 심안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중생의 삶과 보살의 삶.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사시겠습니까? 그 선택은 지금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똑같은 물인데 누가 마시느냐에 따라서 독이 되기도 하고 우유가 되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배움은 깨달음을 얻게 하고 어리석은 배움에는 오히려 더 많은 번뇌가 따르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축생과 중생과 보살의 길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도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보살의 삶은 무엇일까요? 어렵게 생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삶을 발원하는 마음을 쓰면 됩니다. 축생과 중생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고 보살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삶을 살지요. 그 차이는 ‘눈’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보살은 눈을 뜬 사람이고 중생은 눈먼 사람입니다. 눈이 멀면 단 100m를 가더라도 얼마나 불편하고 불안하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딱 100m만 눈을 가리고 걸어가는 체험을 해보세요. 한 발짝 떼기가 막막해 머뭇거리다 겨우겨우 걷는다 해도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 부딪히거나 걸려 넘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잠시 눈을 가렸을 뿐인데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경험을 한 뒤에 다시 눈을 떠 보십시오. 눈으로 볼 수 있고 없고의 차이를 여실히 알게 될 겁니다. 또 다른 눈에는 심안[心眼]이 있습니다. 육안[肉眼]으로 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력을 갖춰야 하고, 빛도 있어야 하고 적당한 거리 등의 조건이 필요하지요. 육안으로 본다는 것은 조건이 맞아야 인식과 판단이 가능한 데 반해, 심안으로는 조건이나 유형무형에 관계없이 업식[業識]이 맑으면 볼 수 있습니다.
즉 시공을 초월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심안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혹시 힘든 일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돈이나 명예를 얻지 못해서, 혹은 남편이나 아내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심안을 뜨지 못했기 때문이고, 바로 지금 보살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제 살펴볼 것은 ‘어떻게 하면 심안을 뜰 수 있는가’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살의 삶을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자는 거예요. 그것은 지식이나 학문, 재물, 권력 등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안은 마음공부에 의해서 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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