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말씀 ‘멈춤’에는 자신의 선험적 견해의 작동을 멈추고, 밀당을 내려놓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나의 것’이라는 내 생각, 내 가치, 나의 개념들을 대상에 덧입히지 않는 것,
오쇼 라즈니쉬는 장미꽃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보고 있는 사람의 생각과 기억 경험 듣고, 보고, 알고 있는 것들을 텅 비워야 대상의 현재 실제 모습을 느끼고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대상을 알기 위해선 자신의 선험적인 경험과 생각에 대한 멈춤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오랫동안 바라보는 ‘머묾과 관찰’을 통해 장미와 바라보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을 때 ‘미지의 장미’라는 대상이 바라보는 존재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때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의 가치판단과 선호도로 인한 밀고 당기는 것을 버릴 때 관찰이 순수하게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장미 향기는 좋아서 가까이 두고 싶고, 가시는 찔릴까 봐 두려워서 싫다는 등의 선험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한 평가와 느낌을 갖고 대상을 ‘비추어보면’ 실제 그 순간의 장미를 만나지 못합니다. 멈춤과 머묾은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고통을 경험하고 계시다면 실제로 한 번 실험해 보시길 권합니다.
나의 선험적인 경험과 생각, 가치판단과 선호도로 인해서 고통이 더 배가되지는 않았는지요? 혹시 주변의 환경과 상황이 가져다준 실제 고통보다 자신의 개념과 관념, 생각으로 인해 더 크게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지요?
고통 속에 머물면서 고통을 깊이 관찰할 때 자신과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생기고, 배움과 통찰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대상에 머물면서 관찰하여 알게 될수록 깊은 이해와 지혜가 생겨 더 많은 것들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수용이 깊어지면 편안하고 평온함, 평화 등의 열매를 맺습니다. 멈추고 깊이 비추어보는 시간을 통해 더 행복한 존재여행을 부단히 떠나보는 것도.... 그래서"수행자에게는 내일이 없다." 오직 "지금·여기"가 있을 뿐이다. 내일이나 모레를 기약해서는 안된다.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직시하면서 묵묵히 코끼리 걸음으로 걸어가라. "지금·여기"가 바로 삼천대천 세계의 근본자리이며, 바로 오늘이 영겁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자리이다. 고로 올바른 신행을 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그대로 영원이요. 무한의 시간으로 살아간다.”
“지금·여기가 그대로 도량이다, 자성이 그대로 사찰이다. 세속을 떨치고 입산해야만 입산이 아니고 몸을 일으켜 집을 떠나야만 출가가 아니다. 마음의 산, 마음의 도량으로 입산하고 출가해야 한다. 밖으로 끄달리고 집착하는 마음을 거두고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그대로 귀의이다.”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 즉, 가정 직장 학교가 그대로 여래의 처소이다.
"여기" 우리가 머물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정토요 구경열반의 자리이다.
따라서 나의 발길이 닿는 곳, 내 손길이 미치는 곳마다를 여래의 처소로 알고 청정하게 한다면 따로 불국정토를 찾지 않아도 앉은자리가 그대로 정토가 된다. "지금" 우리가 숨 쉬고 느끼고 말하고 보는 이 순간이 바로 영겁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순간이다. 우리는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하지만 흐르는 시간은 없다. 오직 지금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지금 속에 수억 겁의 과거와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래가 함께 한다. 따라서 "지금"에 2천5백여 년 전 부처님 오신 날이 함께 하고 아득한 훗날이라는 미륵부처 오실 날이 함께 한다. 따라서 바른 수행자라면 누구나 "지금·여기"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 현실에 자기가 할 수 있고 바라마지 않는 이상의 삶을 일구어 가야 한다. 내일은 없다 모레도 없다는 생각으로 "지금·여기"에 혼신의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삼매의 경지를 이뤄내고 청정한 삶을 가꾸어야 한다. "지금·여기"를 소홀히 하면서 내일을 기약하고 모레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다만 망상일 뿐이고 자기를 속이는 일이 될 뿐이다. 비단 수행자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지금·여기"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씨앗을 뿌리지 않는다면 그가 거둘 수 있는 열매도 결코 최선의 것일 수는 없다.
선한 일엔 선한 과보가 따르고 악한 일엔 악한 과보가 절로 따르듯이, 지금 여기서 한 일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게 결과로 다가오게 되어있다. 그것은 필연이다. 필연일진대 내 운명을 탓하고 남을 탓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런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내 탓으로 받아들여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바로 "지금·여기"가 근본자리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내 속에는 수억겁 거쳐오는 동안에 쌓아 올린 업의 뭉치가 들어있다. 과거라는 시간의 역사가 지금의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짓는 삼업이 미래라는 시간의 긴 흐름 속에서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내 앞을 가로막고 나타나게 된다. 미래가 지금 나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여기"를 외면하고 무엇을 기약하려 하는가.
오직 지금 여기에서 여래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만 바르게 사는 길이 된다. 지금 여기에서 여래에 귀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다운 귀의도 아니요 귀의 그 자체일 수도 없다. 바른 수행자는 그래서 하루살이로 산다. 찰나주의나 향락주의는 아니다. 하루하루 매 순간순간을 지극한 사무침 속에서, 오로지 내게 다가온 상황에 하나로 녹아들면서, 일체의 집착을 놓아 버린채 산다. 거기엔 여한도 기대도 우려도 두려움도 없다. 오직 행동이 있을 뿐이다. 경계와 하나 된 삼매가 있을 뿐이다.
자신을 돌아다 보라.!
지금 이 순간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라.!
여래와 함께 하고 있는가.!
집착을 버린 순수 그 자체로 살고 있는 것이다.
나무 석가 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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