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는 종교가 불교 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입니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불과 10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종교가 불교든 개신교든 천주교든 우리 민족의 모든 사람들의 몸속에는 불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떻습니까.? 기독교인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극성스럽게 다니면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대고 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느새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설치고 다니고 있습니다. 워낙 기복적인 종교이다 보니 귀가 얇고 근기가 하열下劣한 많은 사람들이 흡수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종교만이 종교이고 다른 사람의 종교는 사탄이라고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를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종교가 귀중하다면 다른 사람의 종교도 인정할 줄 아는 그러한 성숙된 자세가 진정한 종교인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비방하고 폄하貶下하려면 그 종교에 대해서 깊이 알고 비방을 하든지 말든지 해야지 그렇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자기 종교와 다르다고 해서 비방하는 것은 맹신자盲信者들이고 종교의 노예들인 것입니다. 자기들과의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 해서 틀리거나 옳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서로의 생각이 다를 뿐 인 것입니다. 그러한 고정된 시각은 편협[偏狹]한 사고방식을 낳고 편협한 사고방식은 사물이나 현상을 한쪽에서만 바라보게 되니 다양성이 부족해서 넓은 세계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두꺼비는 정면만 볼 수 있고 양옆은 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눈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두꺼비는 앞으로만 갈 줄 알지 옆으로는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꿔서 말을 하자면 두꺼비에게는 양 옆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개는 이 세상의 모든 색깔이 한 색깔로만 보이는 완전한 색맹[色盲]입니다. 우리 인간들처럼 빨강 노랑 파랑 등 여러 가지의 색깔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개에게 가서 이 세상은 한 색깔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색깔로 구성된 천연색으로 존재한다고 말을 하면 개는 뭐라고 말할까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그럴 것입니다. 아예 색깔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고정관념은 편견과 부정적인 사고를 낳게 되고 흑백논리 그리고 수직적인 사고방식에만 빠지게 되면서 사물과 모든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이나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봐야 제대로 파악되는 것인데 한쪽에서만 보니 그 고정된 각도는 많은 분야에서 사회적 갈등과 분쟁을 야기[惹起] 시키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들을 자기 것만 고집하지 말고 좀 더 유연한 자세로 여러 각도에서 보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이 사회를 안정적으로 만들고 궁극에는 본인이 좁은 틀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될 것입니다.
관습이나 편견에 얽매이지 말고 내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의 변화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모두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해 주고 배려해 주고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면 나라 전체가 안정되고 더 나아가 인류 전체가 조용하면서도 안락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공자[孔얘기를 하겠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많은 열국들이 서로 전쟁을 끊임없이 했는데 그 당시 공자가 학문이 높고 그의 덕망이 세상에 널리 퍼지자 위정자[爲政者]들이 공자를 정치에 이용할 목적으로 공자를 수배[手配] 했는데 이를 눈치챈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채나라로 피신하던 중 일어난 일입니다. 공자와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고 일주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제자인 안회顔回는 생명을 걸고 군사들의 눈을 피해 매일 양식을 구하러 다녔으나 쉽게 구할 수가 없어서 애를 태웠습니다. 어느 날, 안회는 마침내 양식을 구하였으므로 스승인 공자에게 밥을 지어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핏 잠에서 깨어난 공자가 눈을 떠보니, 안회가 솥에서 밥을 한 움큼 집어서 날름 자기 입에 넣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자는 기가 막혔습니다. 안회는 공자가 제일 믿고 사랑하던 제자였는데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평소에는 나를 위하고 공경하는 척하더니 제 배가 고프니까 저런 짓을 하는군. 다른 동료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밥상을 들고 들어오자 공자는 대놓고 묻는 대신 가르침을 줄 생각으로 안회를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을 꾸었는데 돌아가신 아버님을 만났다. 아버지께서는 꼭 살아 계실 때처럼 꿈에 나타나셔서 쌀밥을 드시고 싶어 하셨다. 내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깨끗한 이밥을 먼저 드리고 먹어야 하겠다.” 그러자 안회는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안됩니다. 이 밥은 아까 밥을 지을 적에 움막의 천정에서 먼지와 흙이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너무 더럽고 그렇다고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서 제가 밥 위에 있는 먼지와 흙이 묻은 밥을 걷어 먹었습니다. 제 손을 탄 것이니 제사에 올리기엔 적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스승님께서 그냥 드시고, 내일이라도 제가 다시 쌀을 구해다가 밥을 지어 드릴 테니 돌아가신 아버님께 올리도록 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이렇듯 자신을 공경하는 안회를 두고 한때 나마 의심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아!! 내 눈으로 본 것이 다 옳은 것만은 아니구나.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일이니라.” 안회는 공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안회가 죽자 공자는 제자들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하늘이 나를 버렸다.”라고 할 정도로 안타까워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오해’입니다. 우리 불자들도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재가자이던 출가자이던 신행생활을 하면서 서로 수행하는 방법이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를 인정해 주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와 수행하는 방법이 다르다 해서 무조건 그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자체가 고정관념이고 경직된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생활이 반복되다 보면 습관과 관습에 길들여져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그것이 굳어져 버리게 되면 자기 것 외에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쩌면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한여름 한철만 사는 ‘여치’나 ‘매미’ 에게 겨울에 지붕에 달린 고드름이나 얼음을 얘기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여치나 매미의 머릿속에는 고드름이나 얼음의 생각 자체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넓은 것입니다. 개구리가 우물 속에 살면서 우물 안에 갇혀 우물 안의 세상이 다인 줄 알고 우물 밖의 세상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할뿐더러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상상조차 하지 못하여 내가 갇혀있는 나의 생각과 나의 지식과 나의 경험과 나의 감정에 빠져 있다면 그러한 편협한 생각과 지식과 감정은 무한한 자기의 가능성을 부정하여 마침내 소인[小人]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벼룩은 자기 키의 수백 배를 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병 속에 집어넣고 한참 있다가 병 밖으로 꺼내 놓으면 병 높이 밖에 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그릇이 있는 것입니다. 큰 그릇인가 작은 그릇인가는 본인이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단 어딘가에 집착하여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게 되고 그러면 고여 있는 물처럼 썩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얼마 전에 불교신문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불교학자가 쓴 글을 보니 오매일여[寤寐一如] (수행을 하여 잠을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정신이 항상 여일하여 꿈이 없는 경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 어떻게 정신이 똑같을 수 있냐는 것이고, 그것은 방편으로 정진을 열심히 하라는 뜻에서 만들어 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황당 [荒唐]하고 지나가던 소가 웃을 노릇입니다. 그 사람은 수행을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했는지 모르지만 견성성불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장미꽃 한 송이를 꺾으려 해도 손이 가시에 찔리는 아픔을 감수해야 되고 갱도에 들어가서 금을 캐는 일도 목숨을 걸어야 되거늘 하물며 수억 겁을 윤회를 하며 무명 속에서 취생몽사[醉生夢死] 하던 중생이 모든 번뇌를 여의고 우주의 이치를 모두 통달하여 생사에 자유자재한 부처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하늘이 없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확고한 신념은 좋지만 그것이 지상[至上]의 절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어떤 생각과 감정이 엄습을 해도 생각의 문과 감정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물에서 빠져나와 대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법문은 글만 읽어보고 무시로 들락거리는 중생에게만 해당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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