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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안의 곳간

무기

 

두 가지 무기!

1) 자유 의지의 가치
인간은 자유롭게 자기의 의지대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그 실례로 든다. 아울러 신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자재하고 전지전능하다는 불사의 신은 자살할 수는 없으므로 실제로는 자유자재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자유 의지의 가치를 강조하는 데 있지 않고, 실제로는 자살을 예찬하는 데로 귀결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 불교에 의하면 자살은 무가치한 자유 의지이다. 자살이 자신의 과거를 일소해 버릴 수 있다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이루어질 수는 있겠지만, 기대하는 결과를 확인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기대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과거의 행위가 남긴 여세 즉 업은 더 살아 있을 경우에는 해소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만, 자살할 경우에는 자살 자체가 야기한 업과 함께 어울려 전혀 기대하지 않는 다른 생을 이끌 것이다.
어쨌든 자유 의지는 악행보다도 강하고 많은 선행을 선택함으로써 과거의 불행을 미래의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운명론과 같은 결정론보다 유익한 가치를 지닌다. 설혹 자신의 미래가 최상의 상태로 결정되어 있다고 보장될지라도 실제로 선택하는 행위에 따라서는 그 보장이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할 수도 있다. 힌두교의 한 신화는 이러한 사실을 암시적으로 지적한다.

라바나는 『라마야나』라는 인도의 서사시를 통해 인도인에게는 인간의 적을 대표하는 마왕으로 간주되어 있다. 그런데 신화에 의하면 애초에 열렬한 수행자였던 그가 포악한 마왕이 되어 버렸다. 머리가 10개 달린 마귀였던 라바나는 1만 년의 고행을 결심하고 1천 년을 고행할 때마다 자신의 머리를 하나씩 떼어 내어 최고의 신인 브라마(범천)에게 공양했다. 9천 년이 지나고 마지막에 이르러 남은 하나의 머리마저 브라마 신에게 공양하려 하자. 이에 감복한 브라마는 그에게 불사(不死)의 힘을 과보로 주었다. 불사를 얻은 라바나는 이제 거칠 것 없이 포악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했다. 『라마야나』에서 이 라바나는 비슈누 신의 화신인 라마에 의해 퇴치된다. 그의 불사력도 그릇된 선택으로 인해 회수되고 만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 선하거나 악한 업을 낳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의지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그 의지가 6식과 함께 작용함으로써 6식은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6식 중에서도 특히 제6식이 의지와 함께 작용함으로써 업은 발동 한다. 그래서 업을 낳는 주체를 8식 중에서 지목한다면, 그것은 의지와 결합하여 작용하는 제6 식이다. 그런데 이 의식의 심층에 있는 제7 식인 말나식과 제8 식인 아뢰야식은 업을 발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 두 가지 심층 의식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無記)의 성질을 지닌다는 것이다.

2) 업의 발동과 무기
불교의 업보 윤회설을 믿는 사람들이 운명론에 빠진다면, 그것은 아마 최심층 의식인 아뢰야식을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할 것이다. 아뢰야식에 대해서는 보통 다음과 같은 생각이 상식으로 통용되어 있는 듯하다.
전생에 지은 선업이나 악업이 현생의 나를 이끄는데, 이 같은 일이 가능한 것은 전생의 업이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축적되어 있다가 적절한 때를 맞아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는 전생의 업은 식물의 씨앗과 같다. 아뢰야식이란 이 씨앗에 상당하는 업력의 덩어리이다. 그러므로 전생의 악업은 그 여세가 아뢰야식으로서 보존되어 있다가 전생의 악한 성질을 그대로 따라서 작용함으로써 불행한 과보를 낳는다. 결국 아뢰야식은 전생의 업이 남긴 기운을 담지하면서 그 업에 걸맞은 과보를 낳게 하는 윤회의 주체이다.

이상과 같은 이해는 대체로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러한 이해로 인해 업보 윤회설을 운명론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뢰야식으로서 보관된 선악의 업은 선하거나 악한 그대로 과보를 낳는다고 믿음으로써 현생의 과보는 이미 아뢰야식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 오해라면, 이 오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오해의 원인은 아뢰야식이 전생의 선악의 성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아뢰야식은 윤회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선악의 성질을 지니지도 않으며, 이러저러한 과보를 직접 생성하는 주체도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지목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과 말나식은 무기이며 업을 발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불교의 경전이나 논서에서 간혹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아뢰야식이 마치 씨앗(종자)처럼 윤회의 주체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그 표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한 씨앗을 사실인 양 이해함으로써, 아뢰야식은 씨앗과 같은 실체로서 직접 선악의 과보를 낳는다고 오해하게 된다.

이미 설명했듯이 아뢰야식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과거의 업이 남긴 힘, 즉 습기(習氣)이다. 좀더 쉽게 말하면, 그것은 기억으로서 떠오를 수 있는 과거의 경험이다. 과거의 경험이 항상 모두 기억으로서 떠오를 수는 없지만, 평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던 과거의 경험이 기억으로서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은 곧 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이 점에서 아뢰야식은 아직 기억으로 표출되지 않는 과거의 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기억의 내용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영향을 주는 것은 아직 표출되지 않은 기억 자체가 아니다. 기억은 우리의 의식에 떠오를 때만 현생에서 업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과거의 경험을 기억의 내용으로 떠올리는 사실 자체가 의식의 작용이며, 이로부터 업이 발동한다. 아뢰야식인 습기는 제6 식인 의식이 작용하는 데서 자료 즉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업을 발동하는 실제 주체는 의식을 포함한 6식 전체이다. 무의식적으로 저절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말나식은 무기라고 한다. 따라서 말나식은 이처럼 미래의 자기에 영향을 주지 않는 마음이다.

그런데 말나식의 자아 집착 작용은 자기를 그릇된 인식으로 오염하는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 작용하는 데서 연유한다.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라는 네 가지 번뇌는 말나식에 부수하여 작용하는데, 이것들은 자기에 대한 무지이거나 집착이다. 이러한 번뇌들이 자기의 마음을 덮어 버림으로써 결국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에 장애가 된다. 그래서 말나식은 무기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번뇌에 덮여 수행을 방해하는 무기이기 때문에, 그 무기는 ‘유부(有覆)무기’라고 불린다. 이에 대해 아뢰야식에는 그러한 네 가지 번뇌가 부수하지 않기 때문에 아뢰야식의 무기는 ‘무부(無覆) 무기’라고 불린다.
유부란 번뇌로 덮여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집은 아치, 아견, 아만, 아애라는 넷을 한 마디로 일컫는 것이다. 의식을 포함한 나머지 6식은 아집이라는 번뇌로 덮여 있는 말나식을 대상으로 삼아, 함께 작용하는 의지(思)의 선택에 따라 선악의 업을 짓게 된다. 이 점을 『성유식론』에서는 “그 넷은 항상 내심(말나식)을 흐리게 어지럽히고 밖으로는 6식을 항상 잡다하게 물들인다. 이로 인해 중생은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으니, 그것들은 번뇌로 불린다.”라고 설한다.
그렇다면 아뢰야식을 무부무기라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그것은 지혜 즉 바른 인식의 발생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능가경』이라는 대승 경저에서 모든 중생이 지니고 있다고 하는 불성 또는 여래장을 아뢰야식과 동일한 것으로 설명한 데에는 무부무기의 그와 같은 의미가 고려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아뢰야식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반드시 바른 인식을 갖고 있지는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말나식에 있다. 우리의 현생에서는 말나식이 아집이라는 번뇌와 함께 작용함으로써 6식의 인식 작용도 오염시킨다. 그리고 이리 하여 발동하는 업이 다시 아뢰야식으로서 잠복함으로써 아뢰야식은 대개 번뇌의 상태로서 존속하게 된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 이전이 아뢰야식은 유루(有漏) 즉 번뇌라고 하다. 그러나 현생의 이 아뢰야식은 그 번뇌 또는 업으로서 축적되어 성숙해 가다가, 사후의 어느 시점에 새로운 출생으로서 그 과보를 드러낸다.
전생의 악업으로 인해 내가 현생에서 저급한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이 불리한 출생으로 전생의 악업이라는 빚은 대체로 청산한 셈이다. 아뢰야식이 무기라는 사실도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전생의 선악은 현생에 태어난 양태로써 대체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되다. 그러므로 전생의 선악이 이미 그 대가를 치른 현생의 아뢰야식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물론 현생의 양태로써 전생의 빚을 완전히 청산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내가 얼마나 많은 전생을 거쳐 왔는지도 모르고,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사소한 빚들이 쌓여 예기치 않은 어떠한 과보를 초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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