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향락이란 고통이 뒤따르는 것을 무얼 그리 탐하며, 한 번 참으면 두고두고 즐거울 텐데 어찌 닦지 않는가?
학인으로서 탐욕을 내는 것은 수행인의 수치요, 출가한 사람이 재산을 모으는 것은 세상의 웃음거리로다.
끊임없이 변명하면서도 어찌 그리 탐착 하며, 다음 다음하면서도 애착을 끊지 못하는구나.
당장 할 일은 한이 없는데도 헛된 일을 버리지 못하며, 끊임없이 핑계를 대면서 끊을 마음은 내지 않는구나.
오늘만, 오늘만 하면서 나쁜 짓은 날마다 늘어가고, 내일은, 내일은 하면서 착한 일하는 날은 별로 없으며, 금년, 금년 하면서 번뇌는 한량없고, 내년은 또 다가오는데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시간은 촌각으로 흘러 어느새 하루가 되고, 하루는 이틀로 흘러 어느덧 한 달이 되며, 한 달은 두 달로 흘러 문득 한 해가 되고, 한 해는 두 해로 흘러 어느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 누워서는 게으름만 피우고, 앉으면 생각만 어지러워진다.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위와 같이 경계하고 있는 것을 어찌 나와는 무관한 수행자의 일일 뿐이라고 지나칠 수 있겠는가. 안락한 미래를 꿈꾸며 그 꿈의 실현을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훈계로 뜨끔해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안락이 비록 물질적 풍요라고 할지라도, 그 풍요는 결핍으로 인한 마음 고통을 겪지 않으려는 데서 추구되는 것이며, 그 마음 고통을 달리 표현하여 번뇌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므로, 우리는 스스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지 간에 수행의 과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란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번뇌를 제거하는 노력이다. 유식학은 번뇌의 원인이 바로 우리의 의식 활동 자체에 있음을 면밀하게 파악해 내어, 의식 활동이 어떻게 번뇌로 생성되고 발동하는지를 해명하는 것으로 번뇌 극복의 수행을 유도한다.
다시 말하면 유식이라는 진상을 수긍하는 것이 수행의 출발이며, 이후 수행의 목표는 번뇌로서 발동하던 느낌과 생각과 앎 등의 모든 의식이 있는 그대로의 진상을 비춰 내는 순수한 상태로 바뀌게 하는 것이다.
유식 수행의 목적인 전식득지(轉識得智)란 이러한 의식의 전환을 가리킨다. 이것을 더 간결하게 표현하여 전의(轉依)라고 한다. 우리가 옳은 것으로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이 그릇된 지식이요 곧 번뇌라고 간주하는 데서, 전식득지는 수행의 기본 목표가 된다. 이러한 수행은 우리가 현재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생존 방식을 부정하거나 거부해야 하는 것이므로, 범부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가 역사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이루어 온 물질적 정신적 진보가 바로 전식득지의 과정이며, 한 인간이 태어나서 나름대로의 성취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또한 전식득지의 과정이다. 이처럼 개인의 성장 과정은 말할 것도 없고 인류의 유구한 역사가 전식득지의 과정이지만, 그 전식득지는 여전히 미완인 채로 지속되고 있다.
의식 또는 지식의 전환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새로 얻은 지혜는 항상 진실인 양 위장과 가정과 상상과 분별 등의 허구로 덧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식득지(전의)는 전혀 생소하건 파격적인 수행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 생존 방식을 거부하면서도 바로 그 생존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진실 체득의 과정이다. 다만 그것은 위장된 진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반성하고 파기해 가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일상의 생존 방식과는 다른 점이다. 이 수행 기간을 거의 영원에 가깝게 설정한 것은 허구에 쉽게 안주해 버리고 마는 인간의 편의적인 습성을 경계하는 데 주안점이 있는 것이지, 목표 달성의 요원함이나 깨달은 자의 위대함을 강조하려는 데에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불교의 수행, 유식학이 천명하는 수행을 너무 난해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심리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그릇된 사고와 습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나로서는 실천할 수 없다는 쪽으로, 또는 굳이 실천하기 어려운 쪽으로 수행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우리의 심리에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스스로 감당하지도 못하는 극단적 또는 궁극적 방법을 먼저 떠올린다.
그래서 우리는 스멀거리며 기어 나오는 번뇌를 다독거려 제압하는 노력보다 번뇌를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번뇌의 근절을 지향하는 노력을 흔히 수행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번뇌란 곧바로 뿌리째 뽑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번뇌를 식물로 비유하자면, 번뇌는 우리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으로부터 양분을 흡수하여 줄기와 가시가 치성한 덤불로 자라 난다. 이때 이 식물이 발아하여 성장하게 하는 양분을 종자(種子)라고 하고, 끈질기게 자라나는 가시덤불을 현행(現行)이라고 한다.
우리의 마음에 잠재 인상으로 잠복해 있는 번뇌가 종자이며, 이것이 양분이 되어 구체적인 심리 현상으로 표출되는 번뇌가 가시덤불이다. 이 가시덤불을 완전히 제가하는 간단한 방법은 그 종자를 없애 버리는 것이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잠복해 있는 그것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고, 애써 색출하여 없앴다고 안도하는 사이에 또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거나 잠입해 있다. 그러므로 번뇌를 뿌리째 제거할 생각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의욕에 그치기 쉽고 머지않아 자포자기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모두에게 가능한 방법은 뿌리를 제거하기에 앞서 당장 앞길을 가로막는 줄기들을 쳐내어 그 번성을 억제하는 것이다
색출하기 어려운 종자를 찾아 헤매면서 더욱 번성해 가는 가시덤불을 방치하기 보다는 줄기가 터져 나오는 족족 다스림으로써 가시에 덜 시달릴 수 있다. 싹과 줄기를 계속 틔워 내던 종자도 언젠가는 그 양분을 모두 소비함으로써 스스로 고갈되고 말 것이다.
유식삼십송은 2종의 악습을 버림으로써 전의, 즉 전식득지라는 해탈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결론으로 지적한다.
이권초(二券抄)에서 이 대목을 매우 탁월한 식견으로 해설하고 있다. 2종의 악습이란 번뇌장과 소지장이라는 2종의 장애이며, 이 장애를 소멸하는 것은 유식 공부의 목적이기도 하다. 양편은 그 장애 소멸을 복(伏)과 단(斷)으로써 해설하는데,
‘복’은 제압을 가리키고 ‘단’은 근절을 가리킨다. 번뇌장과 소지장에는 그릇된 가르침이나 생각 등의 지적인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 후천적으로 몸에 밴 것이 있는가 하면,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 또는 선천적으로 몸에 밴 것이 있다.
후천적인 것은 비교적 제거하기가 용이하지만, 선천적인 것은 쉽게 제거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후천적인 것이든 선천적인 것이든 이것들은 각각 제압과 근절의 단계로써 극복될 수 있다. 제압이란 번뇌의 종자로부터 구체적인 현상으로 표출되는 것을 지혜의 힘으로써 억제해 가는 상태이다. 이에 대해 근절은 그 종자까지 완전히 제거해 간 상태이다.
번뇌를 제압해 가는 것은 수행의 기초 단계인 자량위와 가행 위의 과정이다. 여기서는 번뇌가 뿌리째 뽑히지는 않고 종자의 상태로 존속하지만, 그것은 발동하는 대로 제압되어 간다. 이후의 단계인 견도에서부터는 번뇌를 그 근원까지 잘라 내는 근절이 가능하지만,
이 근절은 부처가 되기 직전까지 계속된다. 번뇌의 발동을 제압한 이후 그 근원 즉 종자를 제거하는 데는 반드시 무궁한 기간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대승불교의 취지에 따르면, 이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기 되기 직전까지 일부러 번뇌의 종자를 끊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보살도를 끌어댈 필요도 없이, 번뇌의 종자를 간직한 채 번뇌를 제압해 가는 것은 모든 범부가 자신의 삶에서 유식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방도이다. 꿈틀거리며 빠져나오는 불편한 심리든 불쑥 터져 나오는 파괴적인 심리든, 그것을 발동시키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되돌아보면서 그 발동을 무마하고 달래려고 생각하는 데서, 이미 유식의 수행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