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리에 사무치면!
현대 사조(思潮)는 여러 갈래로 다원적이고 다양한 문화현상들이 하나의 도리, 나의 근본 체성(體性)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전환기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어느 분야에서나 모두가 다 개방적이고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하나의 진리, 포괄적인 본체로 나아가고 있다. 상(相)에서 체(體)로 또는 분열(分裂)에서 화합(和合)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 따라서 이런 시대를 맞이하여 불교도 내 종파 네 종파의 편견에서 벗어나 불법의 근본이자 우주의 법칙인 반야바라밀로 돌아가는 것이 절실한 때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여러 가지 방편이 있는 것인데 우주 자체가 무량무변한 진여불성이므로 불성을 깨닫는 대도(大道)에는 문이 따로 없는 것,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무엇이 조주입니까’하고 법을 물으니까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이라’ 진실한 조주는 어느 한 문이 아니라 동문이나 서문이나 남문이나 북문이나 어디에나 걸림이 없는 참 성품이라는 말이다. 불법은 이와 같이 위대한 길이기 때문에 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진리에 마음만 사무치면 상을 여의고서 본체를 지향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수도정진하는 과정에서 물(水) 보고 깨닫고 불(火) 보고 깨닫고 달(月) 보고 깨닫는 것이다.
문제는 오직 우리가 체(體)를 여의지 않고 용(用)을 나투고 또는 용에서 본체로 돌아가는 간절한 뜻이 없으면 수행자의 자세가 못된다. 우리는 오로지 한눈팔지 않고 근본성품인 진여불성을 깨닫고 진여불성과 하나가 되고자 출가사문이 된 것이다. 삼천대천 세계도 모두가 체에서 용으로 화현(化現)되었다가 다시 체로 돌아간다. 체와 용이 원래 둘이 아니지만 현상적인 세계는 체에서 용으로 온 세계, 현상적인 용(用)이란 본래 본체에 입각해서 용(用)을 나투어야 온전한 바른 통찰과 올바른 수행이 되는 것이다. 본체란 가명(假名)과 가상(假相)을 여윈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자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아· 무소유의 경계는 일체만유 그대로 진여법성의 경지입니다. 어느 것도 진여법성, 부처님 아님이 없는 자리입니다.
한 생각 잘못 비뚤어져서 ‘저것은 부처가 아니다, 이것은 부처다’고 분별하는 마음 자체가 체를 여의고서 상에 얽매이는 미망인 것, 따라서 모두가 부처라는, 일체공덕을 원만히 갖춘 진여불성이라는 생명의 실상자리에다 우리의 마음을 둔다면 우리의 행위인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청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참다운 도덕률,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예수나 그런 성인들의 행위도 모두가 도덕률에 따른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도덕률의 본체는 바로 참다운 철학인 우주의 도리요, 불교에서 말하면 진여불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는 본래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생명이기 때문에 말하는 언어나, 행동하는 몸짓이나 조금도 윤리 도덕에 어긋날 수가 없다. 말을 함부로 한다거나 또는 음행을 한다거나 또는 음식을 함부로 먹는다는 것은 모두가 다 도덕률 곧 우주의 천연자연(天然自然)한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것이다. 철학에서도 인간성의 실존 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어떤 분야에서나 인간성을 탐구하는 문제가 가장 절실한 근본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인간성을 똑바로 깨닫고 가르치는 가르침은 불교 외에는 없다. 절대로 아전인수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 수행자는 인간성을 개발하는선구자 다. 현대사회의 선구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도덕적으로 우리는 완벽을 기해야 한다. 인간이란 약해서 마음으로 다짐을 해도 미끄러지고 비틀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칠전팔기로 즉시 다시 일어나서 나약한 자기를 추슬러야 한다. 땅에 넘어지면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나듯이 강인한 의지로 다시 바로 일어나서 한사코 법성(法性) 자리에 우리의 마음을 붙이고 미망의 그물을 벗어나야 한다.
'위 없는 법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조단경(六祖壇經) (1) | 2024.02.12 |
---|---|
오직 일념으로 나아가는 길 (0) | 2024.02.12 |
地藏菩薩本願經(지장보살본원경) 상세설명! (0) | 2024.02.12 |
집착에 이끌려 종노릇 하지마세요 (2) | 2024.02.12 |
선가귀감(禪家龜鑑) (2) | 2024.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