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법을 익혀놓으면 참 힘들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에서 습이 되어 버리거든요. 생활에서도 해야 하는데 잘 안됩니다. 막연한 수행관이 자기한테 심리적으로 영향을 주고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부처님 당시 수행법을 모아놓은 <대념처경>을 보면 행주좌와가 다 공부거리로 되어 있습니다. 일체사 일체처 일체심, 일체 어느 곳에 어느 때 있든지 모두 수행 꺼리라 했습니다. 내가 번뇌가 일어나면 일어난 줄 안다, 또 번뇌가 계속되면 계속된 줄 안다, 번뇌가 멈췄으면 멈췄음을 안다, 번뇌가 멈춰서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다시 일어나지 않는 줄을 안다,
순서가 번뇌가 생겼고 있다가 없어지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번뇌가 일어나서 선정경지에 들었다. 번뇌가 있는 것이 점점 없어져서 없는 것이 목적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잘 못 본 것입니다.
왜 잘 못 본 것이냐 하면 번뇌가 없어서 고요하 고요한 상태에서 고요한 줄 안다는 것이 들어가 있고 번뇌가 일어날 때도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안다는 것이 들어가 있어요. 그것이 위빠사나의 관(觀)이거든요.
번뇌가 있고 없고는 상황적이라. 끝까지 남는 것은, 있고 없는 상황을 여실히 관찰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깨쳤다고 하면 거기서 깨치는 것이지 번뇌가 없어서 고요한 것을 깨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고요하고 싶고 뭔가 경지를 얻고 싶고 그것을 희구하거든요. 그게 목적이 아니에요. 오히려 과정 과정에서 살펴가는 수행자의 마음마음씀에 찰나찰나 알아차리는데, 어떻게 알아차리느냐 하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 알아차리되 알아차리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미세하게 관찰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건듯건듯 봅니다. 머트렇게 본다는 말이지요. 건듯건듯 보지 말고 구체적으로 살피는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내가 있는 그대로 봐야겠다 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하는 각자가 마음을 더욱더 미세하게 관찰하게 하는 그게 정진(精進)입니다. 정밀할 정(精)자에 나아갈 진(進) 자. 정진이라는 것이 오래 앉고 이러는 것이 아니고 순간을 앉더라도 자기의 마음을 정밀하게 미세하게 살피려고 하는 각오, 원력, 의지를 말하며 이것이 정사유(正思惟)입니다.
그런 사유를 통해서 마음을 정하고 나아가는 마음을 먹고 결행하려는 의지를 갖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고요한 데서 화두 드는 것을 연습할 게 아니라 잘 안 되더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화두를 잡도리하는 것을 연습했으면 합니다.
<반야심경>의 ‘불생불멸(不生不滅)’에서 불생이라는 것이 무어냐 하면 미세미세하게 들어가서 내 마음이 탐진치가 생하는 모습을 정확히 100% 미세하게 살펴서 찰나생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깨쳤을 때 그것을 불생이라고 하고 무생이라고 합니다. 불생이라고 해서 태어남이 없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을 너무나 정확하게 봐버리니까 그 자리는 생(生)이라고 할 것이 없다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살아서 생각들이 움직이지만 최극미세 하게 살펴서 부처님 같은 경지가 되어 그 자리에서 살펴보니까
그 자리에서는 마음이 생하는 모습이 생한다 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게 연기돼 있더라 이거지요. 연기도리입니다. 처음부터 끝가지 다 인연법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연기도리를 깨친 것이지요. 연기도리를 깨치다 보니까 그 자리가 무생이고 무아인 것을 알겠고 무상의 모습을 제대로 알겠어요. 우리는 무상무아를 교리로만 알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거든요.
유식불교에서 ‘전식성지(轉識成智)’라는 말을 써요. 식(識)을 돌려서- 식이라면 육식 치료식 팔식- 즉, 알음알이를 돌려서 바로 지혜가 된다는 말입니다. 대승에서 말하는 ‘번뇌 즉 보리’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번뇌를 벗어나서 지혜를 얻는 게 아니라 번뇌 그 자리를 바로 보면 그 자리가 바로 지혜입니다. 용맹심을 가지고 탐심을 관찰하면 그 탐심 무더기가 그냥 미세하게 쪼개집니다. 물리학세계에서 전자현미경으로 분자를 쪼개 완전히 미세하게 살펴보니까 허공이 되어버려요. 그러니 허공이 티끌속에 들어갔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큰 것은 크고 작은 것은 작은 줄 알았는데 물리세계에서 작은 것을 확 펼쳐 보이니까 무한한 허공이 있어요.
그것이 마음수행으로도 연결됩니다. 내가 관찰하는 힘이 미약해서 문제인데 내가 알아차리는 힘 즉 그게 지혜 즉 반야예요. 우리에게는 원래 반야지혜가 있어요. 살필 수 있는 마음, 그냥 해가는 마음뿐만 아니라 해가는 상황을 다시 비쳐볼 수 있는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을 무변광대(無邊廣大)라 했는데 이 마음가운데는 무변한 영능(靈能)이 있어요.
마음을 한 순간 쓰는데 한 생각 일으키는 순간에 팔식도 칠 식도 식도 다 있습니다. 같이 가는 거예요. 육식 따로 있고 치료식 따로 있고 팔식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거예요.
탐심을 내 탐심이 일어나 탐심을 살폈다 할 때, 그 탐심이 계속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수행관에 의해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바르게 깨치고자 하는 원력이 있고 선근이 있기 때문에, 내가 마음을 살펴가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날 때, 아 잘못되었다 반성할 수도 있고 그 마음자체를 수행그릇 삼아서 다음 찰나에 그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심리학자 칼 융 박사가 바르도 상태에서 죄업이 많으면 업식 때문에 밝은 빛을 못 따라가기에 평소에 밝고 맑게 살아야 바르도 상태에서도 좋은 빛을 따라갈 힘이 생긴다고 했는데 과연 이런 것이 있습니까?
전강 스님 법문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명한 율사스님이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신 장면에 입회한 사람이 여럿이었는데 누더기 입은 수좌가 한 사람이 있었대요. 그 수좌가 수행을 많이 한 도인이라. 율사 스님이 껄덕껄덕 숨이 막 넘어가려는데 누더기 입은 수좌가 벽력같이 큰소리를 쳐요. “스님, 정신 차리십시오!” 자기로 봐서는 좋은 경계로 가는 판인데 그만 깨어나게 되어 그 수좌한테 호통을 쳐요. “자네가 내 좋은 가는 길을 왜 방해하는가?” “스님, 어느 경계를 보셨습니까?” “아, 불보살이 나와 영접하려는데 네가 방해를 해서 못 갔다. ” 이 수좌가 “지금 스님은 돌아가시면 저 아래에 있는 까치집에 태어납니다. ” 죽음으로 가는 길에 들어보니 다 맞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율사스님이 참회를 하고 내가 헛공부를 했다고 참회를 했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잘 해야 된다 라는 말은 맞아요. 평소 얼마큼 잘하느냐에 따라 경계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시원찮은 사람이 시원찮은 대로 좋아 보이지만 실제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거지. 스님은, 그런 경계에 속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 화두타파해야 되지 적당히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뜻으로 하신 겁니다. 정말로 극미세 관찰해서 부처님 깨달은 경지인 무상의 도리를 깨쳐서 그야말로 완벽히 해야 마치는 것이지 그전에는 함정이 많습니다. 좋다는 경계도 실은 업(業)으로 오는 겁니다.
선가어록에도 ‘부처가 감응하더라도 따라가지 말아라, 무상(無常)으로 보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떤 경계가 나오더라도 삼법인(三法印)으로 해석하라’
좋은 경계는 선이고 나쁜 경계는 악인데 결국은 선악입니다. 선과 악을 뛰어넘어 해탈하자는 게 불법 아닙니까
'방문하시고 흔적 남겨주세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1) | 2024.11.21 |
---|---|
찰라의 평상심 !!! (3) | 2024.09.12 |
스스로 완벽한 존재 확인하는 공부[염불선] (0) | 2024.06.09 |
참회! (2) | 2024.06.04 |
만물은 홀로 살수 없다 (6) | 2024.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