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삶의 이야기 (105) 썸네일형 리스트형 허공에걸려 넘어지는 사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육신의 고통이나 정신적인 번민도 세월이 흐르다 보면 가라앉게 되고, 사무치던 그리움도 시들하게 되어 그럭저럭 견딜 만 해진다는 뜻으로 하는 한편으로는 내성이 생긴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체념하게 되거나 감정이 바래진 것이다.‘좀 더 냉각기를 두고 생각해 보자’, ‘내일 다시 생각하자’는 것은 바로 이 시간이라는 약방문이 제법 유효한 줄을 알기 때문에 내리는 처방이다.요는 시간이 아니라 한 생각이다. 그러나 실은 ‘시간이 약’은 아니다.그 말의 뜻은 다름 아닌 ‘시간을 벌고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는, 우리들 의식작용의 속성을 꼬집은 것이다.요는 시간이 아니라 한 생각이다.가령 누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해 왔을 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 ‘그래,.. 佛家의 因緣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을 믿는다 모든 일은 인과가 있고괴로움과 즐거움은 인연이 생긴다모든 길흉화복은 전생의 업보이니지금은 있더라도 인연이 다하면 없어진다하니 있다고 기뻐말고 없다고 슬퍼마라모든 것은 인연을 따른다이것이 법의 가르침이다천지가 긴 어둠에 잠기니생사경계가 아득하구나그러니 불과의 인연이 참으로 오묘하구나 기도와 마음공부! 기도와 정진 축원을 매일 꾸준히 하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세생생 익혀놓은 업(業)이나 익은 행동 때문에 삶이 자꾸만 옆으로 빗나가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힘! 이를 간단하게 '업'이라는 표현을 하였지만 업이란 참으로 무섭고 어려운 것입니다. 이 업만 잘 극복하면 성불할 수 있습니다. 이 업은 염불 하나만 가지고도 극복이 되고, 주력 하나만 가지고도 극복이 됩니다. 절을 하는 방법으로도, 경을 읽는 방법으로도 극복이 되고, 화두만 가지고도극복이 됩니다. 그런데도 수행 도중에 자꾸만 내 업을 가지고 나를 흔들어 고비를 만들기도 합니다. 또 좋은 인연이 아닌 잘못된 인연들이 나를 위해 주는 척하며 오히려 수행을 깨뜨려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전 공부를 잘 마쳐야겠다'는 원을.. 염주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는 염주 시내에 나가 택시를 타다 보면 운전석 위의 거울에 염주를 걸어 놓은 차를 가끔 보게 된다. 스님인 나로서는 이 사람이 불교신자인가 보다 하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왜 염주를 걸고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무사고를 비는 뜻에서 건다고 했다. 말하자면, 액운을 물리친다는 뜻에서 염주를 걸고 다닌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복을 맞이하고 액을 물리치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 그래서 스스로 마음을 위안하고자 몸에 부적을 지니고 다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행운을 상징하는 어떤 마스코트를 지니기도 한다. 또 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상징하는 염주나 묵주, 혹은 십자가를 지니는 경우도 있다. 염주는 불교의 수행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글자 그대로 ‘생각을 맑게해 영롱한 구슬처럼 ..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려있다. “저 태양이 언제부터 시방세계를 비추기 시작하였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언제부터 돌기 시작하였는가?” “우리 인간은 언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이 세상 만물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이 있어 반드시 생기게 되어 있다. 머나먼 시간을 씨줄로 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 즉 공간을 날줄로 하여 거기 인과의 무늬가 아름답게 수놓아진다. 우리가 볼 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그 자리 그렇게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여건이 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과법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은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 이 세 가지에 의해서 존재한다. 어떤 사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원인은 나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근본은 바로 나.. 참 보시는 기쁨 주는 것! 보시는 기쁨 주는 것!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은 기쁨이다.그 기쁨은 사랑을 통해서나 물질적 소유를 통해서 아니면 종교적 희열 등 다양한 측면에서 온다.“인간에게 가장 큰 보시는 상대방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즉 환희지 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환희지 보살이 필요한 시대라고 봅니다불교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 아닙니까.참선을 통해 우리는 낙을 얻을 수 있지만 세속에서는 오욕을 통해 낙을 얻을 수 있습니다.불교가 왜 좋은 것일까요. 진실로 나를 볼 수 있으면 늘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인 기쁨이 아닌자연스러운 법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에 맞는 참선, 즉 수행을 해야 합니다.”인간의 전부는 사랑과 희망이다.바람같이 흐르는 세월.. 下心 잘난 척하는 마음 내려놓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심(下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수행의 궁극으로 삼고 있는 무심(無心)조차도 사실 하심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심이 안 되는데 무심이 될 수가 있을까요? 첫째도 하심, 둘째도 하심, 셋째도 하심 하심이란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행자시절 최고의 덕목은 하심이었습니다. 첫째도 하심, 둘째도 하심, 셋째도 하심이었지요. 그래서 행자 당시에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허리를 꺾고 절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당연히 하심을 연습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마음을 낮추는 데서 참다운 공부는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한다면 누가 감히 나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당신들은 스스로를 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나 자신을.. 생활불교 菩薩行 이런 예가 있어요. 제가 예전에 시장에 다니다 보면 어린애를 업고 시들시들하게 마른 배추며 무 같은 야채를 요만큼씩 놓고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노인네들도 조금조금씩 놓고 파는데 물건이 많질 않으니까 빨리 시들까 봐 그게 참 애가 타요. 그러면서 섰다 앉았다 섰다 앉았다 한다고요. 시든 야채를 뒤집어 놨다가 바로 놨다가 하면서요, 그런 걸 보면 깎지도 않고 그냥 삽니다. 그러면 옆에서 그러죠 스님은 왜 시들시들한 것만 찾아다니며 사느냐고 야단입니다. 아 못 먹을 걸 왜 사느냐는 거죠, 그러나 그것이 그런 분을 위해서 야채를 사들이는 게 아니에요. 또 보시를 하려고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단, 내 마음이 아프니까 내 마음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을 좇아 다니면서 사는 거예요. 그..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이제는 '내가 너를 통해서 기쁨을 얻었다'라는 의미가 아니고,'삶이 기쁨 그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어느 순간 보니까 산과 내가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고, 산이 봄과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고,봄 속에서 느껴지는 사계의 전체의 기운과 나의 기운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그와 같은 것의 경험을 지(智)라고 하며, 우리 삶의 닫힌 마음을 여는 순간입니다.여는 순간 지(智)에는 능소(能所)가 없습니다〔無我〕.이때에 유식에 주(住)한다고 하며 식장(識場)을 경험하는 것입니다.식(識)이라고 하는 말의 근본은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 된 앎의 장입니다.그런데 이 앎이 있기까지는 '내가 너를 안다, 내가 추움을 안다, 내가 더움을 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그런데 .. 沈默 침묵은 과묵한 나무처럼 큰 힘을 지닐 수 있는 근본이 되기도 합니다.그래서 부처님은 침묵을 ‘성스러운’이란 수식어를 붙여 때로는침묵이 얼마나 소중한 처신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나라 속담처럼 ‘침묵은 금’이라는 말과도 상통합니다.시시비비를 가릴 때나 진실을 밝혀낼 때 침묵이 효과를 배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예기치 않은 말로 오히려 시시비비 논쟁이 더 불거지고 걷잡을 수 없는 악화일로의 상황을 부르는 경우를여러분은 적지 않게 경험했을 것입니다.불가에 ‘묵빈대처()’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해치고 악의적인 말로 음해하는 세력에 대해 침묵으로 대처한다.살기가 담겨 있는 말을 말로써 대응하면 물리력이 동원되고 급기야 감정이 폭발하게 되므로 이를 삼가는 방법으로 침묵이 유용하다는 판단에서 나왔.. 無處所 묘한 진리의 체는 원래의 처소가 없어 어디에는 진리가 있고, 어디에는 진리가 없고,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참 불교의 진리는 천상천하 두두물물이 묘체 아님이 없어 전부가 다 어느 곳, 어느 때를 막론하고 진리의체는 이 허공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생각이 퍼 일어나는데 그 한량없는 생각을 바로 중생을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은 그 체가 공한것입니다.그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의그 본체는 무엇이냐 하면 공이거든요.확실히 그 생각의 본체가 진공이라고 하는 사실을 요달한 것이 그것이 바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한 것입니다.그래서 그 공적의 이치를 이미 깨달아 버리면 실로 한 중생도 제도받은 자가 없습니다.이것이 바로 이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도리인것, 자성 중생이거든. 자성중생서원도요!한량없는 모습으로 .. 불교애서 말하는 인과는! 불교애서 말하는 인과는!업에 따라 내생이 결정된다고 하는 것은 불교의 기본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전생에 지은 업에 의해서 후생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현생에 짓는 업을 내생에 받는다고 해야 맞다.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중생은 각자 생전에 지은 행위에 따라서 윤회를 합니다.이렇게 각자가 짓는 행위를 업이라고 합니다. 이 업에는 선업과 악업이 있습니다.선업이란 좋은 행위이고, 악업이란 악한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업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이것을 인과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선한 행위에는 선한 과보가 따르고, 악한 행위에는 악한 과보가 따른다고 합니다.과보를 받는 것은 업에 따라서 금생에 받기고 하고, 혹은 내생에 받기도 합니다.또는 그다음 생에 받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 업이 어.. 일체만물은 한몸 남을 해칠수 없어요 너와 나 관계없다 생각할 때 ‘악’ 싹터 一切男子가 是我父요 一切女子가 是我母로다 故로 六道衆生이 皆是我父母로다. 모든 남자가 나의 아버지요 모든 여자가 나의 어머니로다 그러므로 육도의 중생이 모두 나의 어버 이로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의 말씀이지요. 일체중생이 내 아버지 어머니요, 형제 동생이 된다는 이 말씀은 ‘내 혈통’ ‘너의 혈통’이 아무 의미 없는 구분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金가니 李가니 朴가니 하는 것은 사람들이 살기에 편하도록 인위적으로 姓을 갈라놓은 결과일 뿐이에요. 근원적으로는 혈통의 구분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인해 잠시 어머니 뱃속을 빌어 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어머니가 낳고 싶어 낳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만물이.. 분별심 여래의 말은 분별심 치료하는 방면!다만 세간의 일은 헛된 환상일 究竟法 [구경법]이 아님을 알아서 마음을 이 禪門 [선문]으로 돌려 지혜의 물로써 더러운 때를 씻어내고 스스로 깨끗하게 머물며, 단칼에 끊어버려서 다시는 헛된 환상을 이어가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나 앞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헛된 환상이라고 하면, 업을 지을 때도 환상이고 과보를 받을 때도 환상이며. 깨달을 때도 환상이고 어리석을 때도 환상이며,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가 환상이니, 이제 이러한 잘못을 알았다면 환상의 약으로 다시 환상의 병을 것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병이 나아 약을 치우면 여전히 다만 옛날 그 사람일 뿐입니다. 만약 따로 사람이 있고 法 [법]이 있다면 이것으로 삿된 외도의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선의 공부란 이.. 올 바른길 이 한마디 속에 불교 대의와 선적 삶이 다 들어있습니다. 보리자성은 우리에게 깨달음의 자리, 참마음의 자리를 말합니다. 참 마음은 도를 닦고 참선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청정하다는 말입니다. 청정하다는 말은 모든 번뇌망상이 본래부터 없어 자아가 텅 비어 버린 그러한 성품자리를 말합니다.또한 텅 비었지만 일체 공론이 원만하게 구족 돼 있는 그런 자리입니다. 이를 일러서 보리자성이 본자청정 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었다는 부정 속에 구족 했다는 긍정이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부정과 동시에 긍정이고, 긍정과 동시에 부정인 존재의 원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입니다. 단용차심 하면 직료성불하리라. 이와 같은 참마음(보리자성 본자청심)으로 살게 되면 곧바로 깨달음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먼 훗날.. 존재 밀당 없는 네 가지 고결한 마음 사무량심 네 가지 마음이 고통 전환할 열쇠! 존재에 필요한 것들을 수행과 네 가지 고결한 마음을 닦으라는 두 가르침첫 번째 오대를 닮는 수행 이것은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요소를 다섯 가지로 보고, 이 다섯 가지 요소에 대한 사유를 통해 그 특징을 닮는 수행입니다. 땅과 물과 불과 바람과 허공의 다섯 요소들은 공통으로 더러움과 깨끗함 등 어떤 것이 다가오든지 스스로 좋아서 잡아당기거나 싫어서 밀어내는 밀당을 하지 않습니다.밀당 대신 땅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 새로운 생명을 싹틔웁니다. 물은 스스로 흐르면서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불은 생명을 따뜻하게 덥혀 보호하거나 풍성하게 만들고, 나아가 태워서 부드러운 재를 만드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들은 모두 원래.. 默言 下心 하심(下心)하는 자에게는 만 가지 복(福)이 생긴다. 불법을 수행자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심(下心)과 묵언(默言) 수행이다. 하심은 나의 마음을 낮추고 상대방을 존경한다는 뜻으로 겸허와 겸손을 의미한다. 그리고 묵언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필요 없는 말은 삼가고 꼭 필요한 말만 하라는 불교의 기초수행이다. 특히 묵언과 하심은 처음 불문에 들어온 수행자들에게 반드시 실천해야 할 과제로 되어있으며 불교를 신행하는 불자들에게도 꼭 필요한 수행이다. 불교의 하심수행은 모든 중생들이 불성을 구족하고 있다는 근거에서 나온 것이다." 불교는 모든 생명체를 평등한 입장에서 바라본다. 우리들이 현실 생활 속에서 나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존경하기란 쉽지 않은 행동이다. 그래서 금강경에는 *四相(사상)을 끊음으로써.. 고정관념 사고방식 타파하라!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지 마세요!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는 종교가 불교 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입니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불과 10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종교가 불교든 개신교든 천주교든 우리 민족의 모든 사람들의 몸속에는 불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떻습니까.? 기독교인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극성스럽게 다니면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대고 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느새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설치고 다니고 있습니다. 워낙 기복적인 종교이다 보니 귀가 얇고 근기가 하열下劣한 많은 사람들이 흡수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종교만이.. 文語非義![불법 실천의 상징] 사바세계는 ‘말(言)과 글의 유희’가 판치는 세계다. 교묘한 말과 글, 속이는 언어와 문장, 그리고 비방하는 논(論)과 술(述)이 출렁거리는 세계다. 중생들은 ‘말’로만 모든 것을 재단(裁斷)하고, ‘말’로써 모든 일을 해결하고자 한다. 말과 글을 뒷받침하는 ‘책임 있는 행동’은 하지 않은 채. 그래서 항상 다툼이 일어난다. ‘네가 옳으니, 네가 맞느니’하면서. 앞뒤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로 시작된 다툼은 성냄. 탐욕. 어리석음에 의해 ‘크기’가 더욱 증대된다.불교는 말과 글을 신뢰하지 않는데, 원효스님에 따르면 글과 말은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말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문어비의()’로는 진리를 왜곡할 수 있으나, ‘의어비문(義語非文.. 相生하는 세상 만족할 줄 알아야! 달마대사가 전한 법은 말과 문자가 문득 끊긴 ‘불립문자 언어도단’(不立文字 言語道斷)의 진리입니다. 본래 법이라고 이름 붙여서 설한다는 그 자체가 잘못입니다. 입을 열면 이미 잘못된 것(開口則錯)이지요. 명(名)과 상(相)에 사로잡힌 것이지요. 그래서 누가 내게 “불교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언어도단에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법문을 하더라도 미리 준비하지 않고 그때 그때 대중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근기에 맞는 떠오르는 말을 할 뿐, 법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인데 새삼스레 말씀드릴 게 뭐가 있느냐 이 말이죠.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것이 법문 아닌 것이 없어요. 온 세상과 우주에 법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무슨 신통한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후 열반하시.. 거짓 나 를 버리고! 삼라만상[森羅萬象], 일체현상이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해 간다.무상(無常)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못하다는 뜻이지요.제법(諸法)은 연생연멸(緣生緣滅)이라.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사라집니다.이처럼 인연 따라 생기고 멸하기 때문에 나라는, 자기라는 고정불변하고 영원한 실체 또한 없습니다.이것을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이러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면 바로 안락을 얻게 됩니다.이 도리가 바로 삼법인(三法印)입니다. ‘본래부처’라는 것이지요.그런데 중생들의 마음속에는 불성 대신 중생 심이라는 아주 ‘잘난 놈’이 하나 들어앉아분별하고 사량하면서 주인노릇을 합니다. 이 잘난 놈 때문에 나를 괴롭히고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그런데 요상한 것은 이 잘난 놈이 실체가 없습니다. 우리가 있다고 착.. 얼굴이 평온함은 대자유 봄인가 싶더니 만물이 무성해지는 여름입니다. 계절과 같이 우리 인생도 잠시도 머물지 않고 만물과 함께 흐른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화엄경의 한 구절로써 과거와 미래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머무르지 않을 때 비로소 불교 수행의 궁극점인 진정한 자유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현실 생활은 집착이 기본 되고 삼독심을 줄기로 삼아서 영위되고 있습니다. 자신과 가족 혹은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명예와 지위, 재산, 건강 등의 문제로 해서 한 번은 기쁘다가 곧바로 슬픔으로 바뀌고, 한때는 영예롭다가 얼마 후 실망하고 위축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중생의 굴레이며 끊이지 않는 반복입니다. 이러한 놀음에 휩쓸려 공적함을 깨달을 때와는 점점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녹야원에 계실 때 한 외도가 와서 물었습니다... 인과 연 사람은 우연히 태어나는게 아니라고 합니다.인연 또한 우연히 찾아 오는게 아니랍니다.세상에 우연히 없다는 말은 인연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그런데 그 인연은 꼭 내 맘에 맞는 것만은 아닙니다.어떤때는 슬픔으로 어떤때는 기쁨으로 갖가지 형태로 다가옵니다.내가 맞이할 인연에 대해 지나친 환상은 갖지 않는 것이 좋고요.인연을 이끌어 가는 자세가 필요함니다.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인연인 줄 모르고, 보통사람은 인연인줄 알고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소매 끝만 스쳐도 살려냅니다.그 인연을 통해 사랑을 하고 나눔을 통해 정이 드는거라고 합니다.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지켜보고 있기에 마음속 깊이 그 사랑을 품으면 기쁨이 두배로 차오르고 그리움으로 물들이는 향기조차 온통 즐거움으로 가득 채.. 공덕과 복전 ! 하심(下心)하는 자에게는 만 가지 복(福) 불법을 닦는 수행자에게 있어 반드시필요한 것이 하심(下心)과 묵언(默言)수행이다.하심은 나의 마음을 낮추고 상대방을 존경한다는 뜻으로 겸허와 겸손을 의미, 묵언은 일상생활에 있어서필요 없는 말은 삼가고 꼭 필요한 말만 하라는 불교의 기초수행.특히 묵언과 하심은 처음 불문에 들어온 수행자들에게 실천해야 할 과제로 되어있으며불교를 신행하는 불자들에게도 꼭 필요한 수행이다.불교는 모든 생명체를 평등한 입장에서 바라본다. 반야경에서도 모든 중생들은 평등하다는생각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모든 생명체에는 각각의 불성을 함유하고 있다.불성이란 부처의 성품을 의미한다. 마음은 중생들 속에 있기 때문에 중생들은 모두가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가능성을 .. 속세의 소리없는 소리! 俗世의 소리 없는 소리!덧없어지며 잎새 사이도 미혹과 사악함은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다마음이 굳혀지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낡은 것은 버려야,새것은 얻는 것처럼 말이네어리석음과 증오는 낙수를 따라 떴다 지고고정관념은 홀로 떠나는 겁, 몇 번의 환생은 겪었던가떨치지 못한 과거에 어지러워지는 마음세간[속세]에 들어서면 많은 혼란 겪게 되어집착과 분노는 혼란으로 인한 것이니중생의 무지몽매함이 불어온 덧없는 운명의 굴레벗어날 수 없는 나락을 세상의 먼지가 되리라흩어진 꿈속의 하룻밤 인연은아득한 세월을 뛰어넘어 황량한 세상의 끝에서믿음으로 다시 만나리...하늘이시여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은원을 따져 물어 신선을 정하는 이 누구인가연분은 하늘의 뜻이며, 재난을 복으로 바꾸고앞길을 순탄하게 살펴 주세요다 인연이리라..... ((어둡고 우둔함이 곧 밝고 총명함)) ((어둡고 우둔함이 곧 밝고 총명함))“어둡고 우둔함을 능히 알 수 있는 그것은 결코 어둡고 우둔하지 않습니다.그러니 다시 어느 곳에서 초월하고 깨달을 것을 찾겠습니까?지식인이 이 어둡고 우둔함에 의지하여 들어가야 만약 어둡고 우둔함에 집착하여 스스로나에게 돌아올 몫은 없다고 여긴다면 어둡고 우둔함이라는 마귀에게 붙잡히는 것입니다.대개 평소에 지견(知見)이 많으면 깨달음을 찾는 마음이 앞에서 가로막기 때문에 자기의올바른 지견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그러나 이러한 장애도 역시 밖에서 온 것은 아니며, 또한 별다른 일도 아닙니다.다만 능히 어둡고 우둔한 것을 알 수 있는 주인공일 뿐입니다.”어두우니 밝으니 우둔하니 총명하니 하는 것은 이미 사념(思念)에서의 일이다.어두움을 어두움으로 알고 우둔함을 우둔함으로.. 자성불[일심]! 몸을 끌고 갈 때는 마음이 필요하니. 마음을 이용해야 하되 업을 이용하지 말고 자성불을 이용하라육체만 쓰고 마음을 쓰지 않으면 육체를 넘어설 수 없고, 또한 마음만 쓰고 자성불을 쓰지 않으면, 마음을 쓰면 쓸수록 마음은 더 강해져서 마음을 넘어설 수 없어서 자성불을 쓸 수가 없고 자등명에 이를 수가 없다. 자등명에 이르고 자성불을 쓰기 위해서는 마음을 쓰되 자성불이 행하도록 하여야 한다. 처음은 자성불로 행하는 것이 어려울지라도 행하고 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자성불로서 객이 아닌 주인공으로서 행하지 않겠는지요? 육체에 끌려가며 살기보다 마음으로 살고, 업의 마음으로 살기보다는 자성불로 사는 날이 되어야 함.마음이 건강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마음이 병들면 몸도 병이 생긴다. 부정적인 생각과 고민은 스트.. 보리의 마음! 보리의 마음 빈 배와 같은 자유인 대상을 높게 볼 것도 없고 낮게 볼 것도 없다훌륭하다 해서 훌륭한 게 아니고, 높다 해서 높은 게 아니며, 낮다 해서 낮은 게 아니니 평등하게 보라대상을 내 몸과 같이 보라. 그것이 불심이다.부처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신다 하더라도 높이 보지도 말 것이며 개미 새끼 한 마리, 풀 한 포기라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벌레를 보고 징그럽다 하고, 오물을 보고 더럽다 하지만 그것은 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상대를 보고 어떻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형상, 그 마음이 둘이 아니니 주인공 자리에 계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높은 산 위에 올라서서 마음을 내려다 보라. 그러면 크다 작다의 구별에 앞서서 평평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그와 같이 생활에서도 그 위치를 활용해 보라. 모든.. 찻잔 속에 미소 도반처럼 마주 앉아 있어도 연인 되어 옆에 다정히 앉아 있어도 되고 싫다하여 그냥 향이라도 좋다오 눈 꽃송이 화원을 병풍치고 뭇새 노래 삼아 마주한 동공 속에 마음 자리하나 무심의 언약이라 오늘 쪽빛 하늘을 담은 늘 싱그런 향을 채운 차나 함께할 이는 없는가요? 뾰뜨르르... 찻잔 소리 물결 되는 보고픔 정녕 우려낼 수 없는 것인가요? 보고 파서 독백을 하는 것인지 외로워서 푸념을 하고픈 것인지 찻잔 속에 미소만 가득하구나! 오시는 분마다 웃음 가득한 미소차 한 잔 드시고 가세요 _()_ 묵은지 보살의 수행 보살의 수행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작용하는 마음이에요. 작용 이전의 마음, 생각 이전, 분별 이전 본체의 마음을 본다고 한다면 그것이 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변하지 않는 그 마음자리를 다이아몬드, 금강석과 같다고 표현하는 거예요. 지금 쓰고 있는 마음은 끊임없이 변해 가지만 그 마음의 본체는 불변 심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을 변화시키면서 바깥으로 상像을 취한다 이 말이에요. 눈으로 보고 상을 취하고, 귀로 듣고 상을 취하고, 향기로, 맛으로, 감촉으로, 그리고 생각으로 끊임없이 상을 취하고서 내가 만든 상을 붙잡고 오염되어 살고 있어요. 세상에는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지요. 부자이면서 부자인 척을 하면 부자상에 빠진 겁니다. 가난에는 두 가지가 있..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