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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안의 곳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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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장소멸은 어떠한 이치로 이루어지는가? [1] 우리가 마음 한 번 바르게 가지며,생각 한 번 착하게 일으키며 행동 하나 바르고 선하게 하는 일상생활의 이 모든 습성들이 우리의 마음 밭인 티끌만 한 것도 빠짐없이 선의 종자, 악의 종자로 심어지게 된다는 것을 누누이 말했지요. 그리하여 이 선업종자와 악업종자가점점 성숙되어 외연을 기다리고 있다가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각자 지은대로 닦은 대로 그 과보를 받을 수밖에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장차 어떠한 불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또 현재에 불어 닥친 불운한 일들이 있다 해도, 우리가 한량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쌓아 온 악의 종자를 감소시키는 길이 있다면, 그리 불안해 할 것도 절망에 빠질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찰나 생멸하는 체(본바탕)..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 내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행위의 씨앗, 오늘날처럼 격동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큰 방황 속에 동요하고, 실상을 등지며 현상에 따라 움직이는 행복과 명예를 무조건 소유하려고 하는 미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결과는 자기 스스로가 심어놓은 종자의 결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기복에만 정신을 소비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갖는 특징 중에 하나가 내적인 수행으로 바른 마음을 갖는 데 있다고 할 때, 오직 이기적 요구만을 내세워 기도하는 것은, 이 타행을 가르치신 부처님의 본 뜻과는 멀리 떨어진 어리석은 수행일 뿐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불교를 자신들의 안일한 삶의 행복과 기쁨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기원하고 소원하는 기복 신앙에만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운명 ! 사람의 운명은 바뀐다. 대단히 크게 바뀐다.가장 천한 이가 가장 귀한 사람으로 바뀌기도 하고, 가장 귀한 이가 가장 천한 사람으로 바뀌기도 한다.얼굴도 바뀐다. 산(山) 기도를 몇 년 하고 왔다는 어느 보살은 그 눈이 바로 바라볼 수없게 변해 있었다.붉은 눈은 귀신 눈으로 바뀌어 쏘아보고 있었다. 무엇을 먹었느냐에 따라 몸이 달라지듯,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얼굴이 바뀐다.얼굴을 성형으로 바꾸려하지 말라. 성형으로 얼굴이 바뀌면 운명도 바뀐다. 특히 눈은 남편과 자식 자리이니 건드리지 말라. 누구나 향상되고자 하는 원은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원이 다 이루어지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원이 이루어지겠는가? 그리고 언제 이루어지겠는가?「공자」는 일을 하려면 사람을 기다리라고 했다.내가 바라는 일을 ..
모든 문제의 발단은 ‘나’ 살기 위해 불교에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죽으려고 해야 됩니다. 죽을 사람은 절에 발을 들여놓고, 살고 싶은 사람은 절에 발을 들여놔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을 가르치며) 요거 없애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데도 ‘나’라고 고집하는 그것을 죽이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불교인의 자격이 부여됩니다. 여러분은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합니까. 절이라는 공간은 부처님께 절을 하거나 불공하거나 제사지내거나 기도하기 위해서 오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응어리를 없애기 위해 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응어리가 있을 때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고 사회가 화합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육신의 옷을 벗어버릴 때 여러 분의 가슴에 응어리..
(照顧脚下)늘 자신을 돌아보세요! 산사에 가면 신발 벗어놓는 댓돌 위에 조고각하라고 쓰인 주련 걸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발밑을 살피라’는 뜻이지요.신발을 잘 벗어 놓으라는 뜻도 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지금, 자기의 존재를 살펴보라는 의미입니다.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스스로 살펴보라는 법문입니다. 순간순간 내가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가르침입니다.당나라 때 ‘대매법상(大梅法常, 752~839)’이라는 스님이 있었어요. 일찌감치 온갖 경전에 통달한 분이라고 해요. 하지만 많이 아는 것이 말재주나 늘릴 뿐 마음을 깨치는 데는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스승을 찾아다닙니다. 여기저기 다니다 마조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대 선지식을 만나니 평소 늘 의문인 것을 묻습니다. “입만 벌리면 부처가 어떻고 보살이 어떻고 하는데 도대..
존재와 삶!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육신과 생각은 하늘과 땅이 열린 아득한 태초로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부모님들께서혼돈 속에서 이름 모를 생명체로 시작하여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며 진화하고 지혜와 사랑과 행복을 깨달아 물려주고 물려준 위대하고 숭고한 유산입니다. 우리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사람세상을 살 수 있음을 우리들의 부모님과 부모님의 부모님과 끝없이 이어지는 부모님들께서 마음을 육신과 생각과 함 몸으로 잉태하고 잉태하여 낳고 낳아주신 은혜 덕분입니다. 마음이 존재와 삶의 주체로서 그 공덕이 아무리 높다할지라도 사람 세상에서는 사람으로 낳아 사람세상을 살게 해 주신 부모님의 은혜에는 결코 비하지 못할 것입니다.마음이 비록 존재와 삶의 주체로서 감각, 언어, 행동 등 존재와 삶의 모든 능력을 갖추 어으나 육신세상의..
陰德 평소에 음덕(陰德)을 쌓아라, 기도를 성취하고자 하면 평소에 음덕(陰德)을 쌓아야 합니다. 은행에 가서 돈을 찾으려고 해도 평소에 저축을 해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평소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음덕을 쌓아 베풀어야 기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선행을 쌓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선행을 받을 것을 바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땅에 씨앗을 뿌리지 아니하고서 풍년이 되기를 기도한들 무엇을 거둘 수 있겠습니까? 잡초는 무성할지 몰라도 곡식을 걷어 들이지는 못합니다. 항상 음덕(陰德)을 쌓아가며 사람들에게 선심으로 대하고 선행을 쌓아간다면 공덕의 문이 활짝 열리고 진리의 과실이 열리는 것입니다. 선행을 쌓아야 그 공덕의 과실이 서쪽이나 남쪽에서도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형상적인..
문은 이분법적 규정에서 나와야 집이나 방으로 들어서려면 문을 통과해야 한다.사찰 법당에 들어서려면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이 쭉 들어서 있다.부처님의 세계, 진리의 세계, 열반과 행복의 세계로 들어서게 하는 문이 법문(法門)이다.그런데 정말 정해진 어떤 문을 통과해야만 그 세계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일까?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선(禪)에서는 진리로 통하는 입구에는 문이 없다고 한다.법문(法門)은 무문(無門)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그 이유를 물은즉 무문 혜개(無門慧開) 선사는 “문을 통해 들고 나는 것은 잡스러운 것들이요,인연을 통해 얻은 것은 마침내 부서지고 말 것이다.”라는 옛사람의 말을 든다.이미 갖추어져 있는데 뭐 문을 통해 찾고 들어설 일이 이겠느냐는 말이다.문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인데 그것으로 통해 ..
불교 인연이란! 불교는 부처님 법을 만나는 인연으로 시작하게 된다. 이 인연을 부처님과의 인연이라 하여 불연(佛緣)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고 인연에 의해서 관계가 맺어진다. 인연이 무엇인가? 인(因)과 연(緣)으로 나누어 말하면 인은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고 연은 간접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꽃이 피었다 할 때 꽃이 핀 것이 인연에 의해 나타난 현상이다. 그런데 이 꽃이 애초에 씨앗이 땅속에 묻혀 있다 발아하여 싹이 트고 점점 자라서 꽃이 피게 된 과정이 있다. 다시 말해 꽃이 핀 것은 씨앗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씨앗이 발아하여 싹을 틔어 자라는 동안 성장할 수 있는 조건들이 갖춰져야 하는 것이다. 땅에 뿌려진 씨앗이 흙속에 수분을 필요로 하고 공기나 햇빛을 ..
참다운 공양이란! 불교는 곧 자비의 가르침이잖아요. 불교의 자비는 자아완성의 실현에서 오는 수행의 단계로 절대 사랑이며 평등의 사랑입니다. 만유(萬有)가 동체(同體) 임을 깨닫고 자기 몸을 보살피듯 하는 사랑입니다. 출가 전에는 자비가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 내 것 아깝다는 생각 않고 내주는 것을 자연스럽게 행했으니 부처님 제자가 될 종자가 있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자비로워야 합니다. 요즘은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만연해서인지 불자들까지도 조금치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더군요. 남을 배려하거나 양보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자기 것을 나눠줄 생각은커녕 마음에서도 여유가 없어 딱합니다.그러나 자비의 마음은 자기 수행을 위한 진실적 마음의 표출인 것입니다. 남에게 한..
더불어 함께사는 존재 평생을 빚쟁이로 살지 않으려거든, 물 한 모금 마시고 밥 한 술 떠 넣으면서도 더불어 먹고 더불어 감사해야 하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 일부러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께 회향합니다." 하는 생각을 지어서 하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깊이 감사하는 마음과 믿음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모든 행동이 일체 중생, 일체제불과 같이 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그대로 회향이 된다. 아침에 국가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베푸는 이의 은혜, 좋은 벗의 은혜를 명심하여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데 어찌 그 다섯뿐이겠는가. 이웃의 은혜, 땅의 은혜, 물, 바람, 불의 은혜등 어느 것 하나라도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것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 하나 잘 나서 독불장군이라 할..
법계가 본래 평등함을 아는 실천인데! 본래 언제나 가운데 머물러도 마음은 항상 평등 (평상심)할 지어다, 사랑 버리고 어버이 떠난 것은 법계 평등 그것이라, 만약 친밀하고 소원함(성김)이 있다면 마음으로 평등치 못한 것이다. 마음 가운데 만약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취하고 버림이 없다면 몸에 어찌 괴로움과 즐거움의 성하고 쇠함이 있겠나 평등한 성품 가운데는 너와 나가 따로 없고, 둥글고 큰 지혜의 자리엔 가깝고 멀고 가 끊어졌다.(뚜렷이 밝은 마음자리엔 너·나의 차별 없어 둘 아니게 평등하고 여여하다) 삼악도를 드나듦은(마음이) 미움과 사랑에 얽힌 바(까닭) 요. 육도를 오르 내림은 친소 차별 업에 묶인 탓이다. 마음 평등한 자리에 계합하면 본래 취하고 버릴 것이 없다.만약 취하고 버림이 없다면 생사가 어찌 있으리오. 위 없는 보리도 이..
위대한 가피! 미친 듯이 정진하면 무한 가피 열린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달이 지구를 도는 것, 그리고 사과가 떨어지는 것 등은 상호 간에 별 관계가 없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공부한 사람들이 이들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가 왜 공부를 해야만 하는가? 왜 기도를 해야만 하는가? 법칙을 공부한 사람들은 사과가 떨어지고 달이 돌고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 모두 중력의 법칙임을 이미 알고 있다. 끊임없이 공부를 해 나가다 보면 삼라만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게 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만유인력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존께서 게으르지 말라, 부지런히 정진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나아가라. 자신을 등불로 삼고 나아가라 하신 이유 역시 끊..
自身과 남에게 원망하지 않는 삶으로!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요. 내일은 오늘의 상속이다. 전생은 금생의 과거요 내생은 금생의 미래이다. 사람들은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전생을 생각하고 내생을 바라보며 금생을 살아가는 이는 흔치 않다. 왜 어제는 돌아볼 줄 알면서 전생은 묵살하고, 내일은 기약하면서도 내생은 잊고 사는 것일까?  그것은 전생과 내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요, 지금 이 순간에 너무집착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빙산의 모습과 같이, 우리의 삶 또한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크기 마련이다. 현재눈앞에 보이는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보이는 것 밑에서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잊은 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하여 보이지 않는 ..
因果는 썩지도 않는다 내 짐을 지지 않고,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내가 되받지 않는다면 누가 받을 것인가. 좋은 말이든 나쁜 일이든, 내가 저지른 因果을 내가 지지 않겠다면, 누가 대신 져 줄 것인가. 대신 밥 먹어 주고 대신 잠자 줄 수 없듯이, 대신 똥 누고 대신 아플 수 없듯이, 내 짐을 어느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은 철칙이다. 한 치의 에누리가 없는 법칙이다. 누가 대신 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아무리 관세음보살을 찾고, 아무리 다라니를 외어도 자작자수의 법칙엔 예외가 인정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대신 짐을 들어주고 싶어도, 아니면 더 보태 주고 싶어도, 야속하지만 예외는 인정되지 않는다. 고로 지금 내게 닥치는 일체의 경계들, 밖에서 다가오고 안에서 솟아나는 일체의 일들..
한 호흡이 생사의 갈림 길! 한 호흡지간에 달린 생과 사 우리의 생과 사는 한 호흡지간에 달려 있어요.숨 한 번 들이마셨다가 못 내쉬면 죽는 겁니다. 이승에 산다고 하는 것은 저승에 사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요. 딴 데 가는 것이 아니에요. 얼마 전 제주도의 마지막 해녀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참으로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여든이 넘은 해녀 할머니의 말씀이 법문처럼 들렸습니다.바다는 딴 세상입니다. 이승과 다른 것입니다.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생사를 담보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러한 저승에서 돈을 벌어서 이승의 삶을 산다고 말했습니다. 저 바다가 저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를 부정하고 외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를 가는 것입니다. 바다가 죽음과 고통을 주더라도 그..
청정한 참마음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 마음일 뿐 거기에는 어떤 법도 없다. 이 참마음은 본래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 않고 예전과 지금을 따질 수도 없다. 또한 길거나 짧지도 않고 크거나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넘어 바로 그 상태 그대로일 뿐이다. 그러므로 분별심을 내고자 하면 어긋나 버린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다. 끝이 없으며 재볼 수도 없다. 이 한 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본래 부처인 참마음 자리는 실로 그 어떤 것도 없다. 탁 트이고 고요하여 밝고 오묘하며 안락할 따름이다. 스스로 깊이 깨달으면 당장 그 자리이므로 원만 구족[圓滿具足]하여 모자람..
스스로 다가온다 깨달음은 자기를 찾는 공부. 자기를 돌아보는 공부. 마음자리 주인공을 찾는 공부. 이 공부는 마땅히 평생을 두고 해야 할 공부이다. 조금 해보고 잘 안된다고 해서 나약해지거나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순간이 더욱 중요하다. 앞서 도를 깨달은 무수히 많은 분들을 생각하며 용맹심을 일으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깨달음이 나에게로 다가온다. 많은 옛 스님들은 후학들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보지 못하였는가? 역대의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옛날에는 우리와 같은 범부였음을! 저도 장부요 그대도 장부. 다만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뿐, 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니라." 이 말씀을 다시 한번 풀어보도록 하자. "이미 지난 세상에 도를 이룬 분들을 살펴보라. 모두가 그대와 다를..
心眼 心眼으로 보세요!껍데기로 들으면 쭉정이만 남을 뿐, 오로지 자신의 혼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흙탕물 같은 소리를 내가 참마음으로 듣는 순간에 청정수로 변하는 이치 세상의 소리를 잘 듣는 사람은 지혜를 얻지만, 필요한 소리만 잘 듣는 사람은 편협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과 음욕에 시달리는 이유는 육체의 귀로 듣기 때문, 참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귀를 막고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그 모든 소리는 참생명의 깨달음의 소리로 들립니다. 이것이 참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깨달음의 가장 유익한 방법은 들어서 깨닫는 것, 나를 비방하는 소리도 귀로 들으면 화나고 괴롭지만 나의 참마음 자리에서 들으면 나를 완전히 해탈시키는 위대한 반야선에 오르는 것이지요. 항상 마음을 열고 들으세요. 네모..
팔풍부동 八風不動 {1} 우리 인생은 팔풍경계(八風境界)에 흔들리면서 여덟 가지 좋고 나쁜 현상과 접하는 일이다.나를 이롭게 하는 이익(利)과 늙어가고 기울며 나에게 손해가 가는 쇠(衰)의 바람,나를 헐뜯고 비방하는 훼(毁)와 나를 기리고 받드는 예(譽)의 바람,나를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칭(稱)과 나를 나무라고 꾸짖으며 비난하는 기(譏)의 바람,나를 괴로움에 멍들게 하는 고(苦)와 나를 편하고 즐겁게 하는 락(樂)의 바람이 그것이다.이렇게 우리는 좋고 싫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얻고 잃어버리고, 만나고 헤어지고, 편하고 괴롭고, 기쁘고 슬프고 등의 여러 가지 경계에 접하면서 파도에 흔들리는 나룻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간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러한 경계에 끄달리면서 산다는 점이다. 경계를 나누는 것도 부족..
마음공부하는 사람은 삼재가 없어요 “놓고 가는 데는 이유 없이 무조건 이어야죠” - “내 할 일 다 하고 내 가정 지키고 부모도리 다하며 자식도리 다하는 게 곧 회향이고 불사입니다” 끊임없이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뀝니다. 물론 부처님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도 없이 찰나찰나 나투는 생활이라고 하지만 우리 중 세계의 사람이 사는 데는 시간도 만들어 놓고, 공간도 만들어 놓고, 날짜도 만들어 놓고, 달력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살아가시면서 한번 더 가슴에 손을 얹고 내 마음을 스스로 개선시키도록 다짐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항상 말씀드리기를 모든 것은 자기 주처에서 하는 것이니 바로 자기 주처 를 믿으라고, 주처라는 것은 주장자도 되고 불성도 되고 주인공도 되고 자 부처도 됩니다. 하지만 그 이름들이야 뭐라고 부르든 어떻겠습니까마는 굳..
참선법!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 진실되게 사는 방법을 이야기해 봅시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말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내 감정에 속지 않고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일은 쉽기로 말하면 참으로 쉬운 일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기로 말하면 참으로 어려운 일 중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육신, 즉 감정의 덩어리로 된 몸뚱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넣어주고 성을 내달라고 하면 화를 불같이 내주는 등 감정이 해달라는 대로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사는 시간이 많지, 참마음이 주인 되어 행동을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팔만사천 번뇌 모든 욕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망상번뇌가 우리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내 ..
좋은 힘! 우리에게는 아주 좋은 힘이 있습니다 "이타심" 이 그거예요 상대를 이익되게 하려는 힘! 반대로 이것의 장애는 안타깝게도 "이기심"이 있어요 예를 들어, 내 주관을 내세워 상대를 무시하거나 또는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한다면 그들도 역시 이기심으로 나를 그렇게 대할 거예요 그랬을 때, 나도 그 일이 신경 쓰이고 그들이 이해 안 가고 힘들잖아요 그렇듯 상대도 그렇게 힘들어 할 수 있겠구나.라고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내가 힘들듯이 말이죠! 내가 가지고 있는 이타심을 잘 살려 상대에게 이익을 주려 노력한다면 그것은 결국 내 이익이 되돌아옵니다 나를 인정해 달라며 고집을 부리며 "저 사람은 왜 그러지? "라고 하기 전에 저렇게 하는 저 사람의 고집과, 그것이 맞다 틀리다고 주장하는 내 고집이 큰 차이가 ..
비워야 채워지는 섭리 올 때에 빈 손으로 왔고 갈 때도 빈 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잊고 산다. 죽음이 임박해서 새삼스레 실감하게 되기 전까지는 이 엄연한 진리를 망각 속에 묻어둔 채로 지낸다.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그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고 데려갈 수 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아끼고 집착하고 목말라하면서 산다. 소꿉장난하는 아이들과 같다. 해 질 녘이면, 다 버려두고 뿔뿔이 흩어질 텐데 땅뺏기 집 짓기에 열중하는 아이들과 같다.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무지만도 못하다. 그래서 어리석음은 독이다. 결코 같이 갈 수 없음을 알면서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가령 저 진시황처럼 미이라가 되어서라도 내 재산 내 사랑 내 명예 내 권력을 지키겠다고 생사람과 황금을 무..
염불공덕! 우리 중생들은 살아가면서 입만 떼면 업(業)을 짓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확히 업을 소멸하거나 닦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업’이란 말처럼 우리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도 드문데 말이지요. 그러면 업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릴 때 뭐라 그럽니까. “나는 왜 이리 전생에 지은 업이 많은 것일까?” “업장이 얼마나 두텁길래 이리도 일이 안 풀리는 것일까” 등과 같은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대체 업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이 업이라는 말의 어원이 본래 우리말이 아니거든요. 업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인데 이것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 땅으로 불교가 전해지면서 한..
문자로는 생사해탈 못 구해 어느 학인이 묻길 “관세음보살이 어떤 분이십니까”하니 선사가 대답하길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을 대신해서 중생을 제도하시는 무연자비의 화신이라” 하셨습니다. 무연자비란 무엇입니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애욕과 집착에 의한 사랑이지만, 부처님이 중생을 사랑하는 것은 무연자비입니다. “중생이 원하는 바가 있어 내 명호를 부르면 그 소리를 들어 다 성취시켜 주겠다”는 것이 관세음보살님의 원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관자재보살이라고도 합니다. 지혜로써 사바세계의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관조하여 중생의 능력과 성격에 따라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관세음은 사바세계 중생의 괴로움을 관조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조는 중생을 사바의 고해에서 건지고자 하는 서원에서 나왔으므로 대비의 승자, 구세..
“我” 허수아비와 같은 “我”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속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모습을 보고 지혜자인지를 분별을 하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데도 마치 아는 것처럼 판단을 합니다 성실하고 착한 것과 지혜로운 것은 분명히 다름에도 그런 선해 보이고 깨끗한 모습을 보고 지혜자라고 판단을 쉽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보려 하지 마세요 너무 알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것을 보려 하는 것은 깊은 바다 위에서 마치 그 속에 무엇이 있나 보려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음을 알면서도 굳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입니다" 입니다 내가 지혜자인지 우매자인지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
자비로운 신심! “뭔가 새롭게 해야겠다” 발심하고 실천합시다 “혹한의 추위가 없으면 저 눈 속에 핀 매화가 어찌 사람의 시선을 끌 수 있는 향기를 얻겠는가” 설중매(雪中梅)가 아름다운 꽃과 향기를 얻기 위해서 혹한의 겨울을 견뎌내듯이 우리 중생도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이것을 절집에서는 발심(發心)한다고 합니다. 뭔가 새롭게 해야겠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된다 해서 새롭게 마음을 내는 것이 발심입니다. 발심하기까지가 어렵다고 했어요. 마음을 내고 각오만 가지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며 편안이며 안락함을 전부 이룰 수 있어요. 그렇게 발심을 했건만 아직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처음의 발심을 잘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번 겨울이 몹시 힘들 겁니다. 추위도 추위지만 구조조정에..
수행자로 살아가기! 세상의 향락이란 고통이 뒤따르는 것을 무얼 그리 탐하며, 한 번 참으면 두고두고 즐거울 텐데 어찌 닦지 않는가? 학인으로서 탐욕을 내는 것은 수행인의 수치요, 출가한 사람이 재산을 모으는 것은 세상의 웃음거리로다. 끊임없이 변명하면서도 어찌 그리 탐착 하며, 다음 다음하면서도 애착을 끊지 못하는구나. 당장 할 일은 한이 없는데도 헛된 일을 버리지 못하며, 끊임없이 핑계를 대면서 끊을 마음은 내지 않는구나. 오늘만, 오늘만 하면서 나쁜 짓은 날마다 늘어가고, 내일은, 내일은 하면서 착한 일하는 날은 별로 없으며, 금년, 금년 하면서 번뇌는 한량없고, 내년은 또 다가오는데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시간은 촌각으로 흘러 어느새 하루가 되고, 하루는 이틀로 흘러 어느덧 한 달이 되며, 한 달은 두 달로 흘러 문득..
무기 두 가지 무기! 1) 자유 의지의 가치 인간은 자유롭게 자기의 의지대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그 실례로 든다. 아울러 신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자재하고 전지전능하다는 불사의 신은 자살할 수는 없으므로 실제로는 자유자재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자유 의지의 가치를 강조하는 데 있지 않고, 실제로는 자살을 예찬하는 데로 귀결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 불교에 의하면 자살은 무가치한 자유 의지이다. 자살이 자신의 과거를 일소해 버릴 수 있다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이루어질 수는 있겠지만, 기대하는 결과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