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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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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說延命地藏菩薩俓 불설연명지장보살경如是我聞 一時佛 在邱羅多山 與大比丘衆 萬二千人俱 菩薩三萬여시아문일시불재구라다산   여대비구중 만이천인구 보살삼만六千人俱 一切諸天 及龍夜叉人非人等 金輪銀輪諸輪王等 從十육천인구 일체재천 및용야차인비인등 금륜은륜제륜왕등 종십方來 爾是世尊 說是大乘 蕪依行已 時有帝釋 名蕪垢生 白佛言世방래 이시세존 설시대승 무의행이 시유제석 명무구생 백불언세尊 我欲護世 若佛滅 候 法末衆生 黨何拔濟 佛告啼釋 有一菩薩名존 아욕호세 약불멸 후 법미중생 당가발재 불고제석 유일보리명曰 延命地藏菩薩 每日晨朝 入於諸定 遊化六道 拔苦與樂 若 在三왈 연명지장보살 매일성조 입어제정 유화육도 발고여락 약 재삼逃 於此菩薩 見體聞名 生於人天 或生淨土 在三善道 聞其名者 得조 어차보살 견차이명 생어인천 혹생정토 재삼선도 문기명자 득現果報 後..
불정심 관세음보살 모다라니경 △ 불정심 관세음보살 모다라니경⇒ 관세음보살께서말세의 중생을 위하여 설하신 진언☆ 아침에 깨었을 때 병이 몸에 침입하여 정신이 산란하면 맑은 마음을 하고지극 정성으로 이 다라니 신주를 외운다면⇒ 관음보살과 모든 금강밀적 등 신장들이밤낮으로 옹호하고 보호하므로 소원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다 하셨다. ☆ 불정심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 아리야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마하사다 바야 마하가로니가야다냐타 아바다 아바다 바리바제 인혜혜다냐타 살바다라니 만다라야 인혜혜바리마수다못다야 옴 살바작수가야 다라니인지리야 다냐타 바로기제 새바라야살바돗따 오하야미 사바하
마음은 네가지로...! “저 산에 많은 무덤을 바라보게 장안의 사람들은 나고 또 죽으니 슬프다. 어찌 오래 사는 술책을 배우지 못하고 솔 아래 한 줌티끌이 되고 마는구나” 이것은 사명당 송 운 대사의 무상시입니다.우리 인생은 이 생에 날 때 부모의 인연 속에 태어나게 됩니다. 사람이 태어나니 늙 고, 늙으니 병들고, 병드니 죽게 됩니다. 언젠가 죽게 마련인 숙명인 게 인생입니다. 일시적으로 잠시 살다 가는 존재이기에 ‘나’라는 존재는 가짜가 됩니다. ‘나’라는 육체는 수만 년을 살다 가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 죽어야 할 숙명적인 존재이기에 ‘가아(假我)’라 합니다. 그러면 ‘실아(實我)’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이 고, 넋이고, 얼이고, 본래면목이고, 영혼이고, 정신이고, 육신을 끌고 있는 주인공입 니다. 육신은 생멸(生滅)이 ..
금생과 내생 今生은 前生의 연속이며 無限한 來生의 연결이고 금생에 주어진 환경이나 운명은 전생에 지은 원인으로부터 맺어진 결과이며, 금생에서 善惡 간에 하고 있는 우리의 행동은 다 내생에 받을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됩니다. 이 육체를 가지고는 천년만년을 살 수 없으므로 육체가 부숴지면 다시 소가 되고 개가 되고 사람이 되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나는 것도 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생에 지은 인연대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연이란 말은 묘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무엇을 해도 친한 사람하고만 같이 합니다. 사람이 수 천명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구경하다가 헤어져 나갈 때도 친한 사람끼리 짝지어 나갑니다. 죽어 가는 길도 자기가 친한 길로, 인연 지은 곳으로 따라갑니다...
아공과 법공 느껴야 형해지색(形骸之色) 사려지심(思慮之心)이 내 몸을 구성한 이런 색이나, 생각하는 내 마음이나 이런 것이 무엇인고 하면.‘ 형상이 있고 뼈가 있는 것이니까 역시 우리 몸뚱이를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우리 마음을 마음을 말합니다. ‘종무시래(終無始來) 인연력고(因緣力故)로, 무시(無始)로 좇아오면서 인연의 힘인 고로.’ 무시란 처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디가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끝도 갓도 없는, 한계 없는 시초부터 서 인연의 힘인 고로, 인연이란 굉장히 의미심중한 말입니다. 일체법의 직접 간접 원인을 다 포함시킨 것이 인연입니다. ‘염념생멸(念念生滅)하여 상속무궁(相續無窮)이라. 찰나찰나에 쉬지 않고 생(生)하고 멸하면서 서로 계속해서 다함이 없는 것이다.’ 염념..
어떻게 살아왔던 지금 이순간 무조건 감사해라 이곳에 오시는 모든 분, 이유 불문곡직하고 무조건 감사해라, 그리고 부모님에게 희생과 섬김으로 효도를 실천하라! 그것이 무엇이든 집착하면 할수록 집착하는 그것에 어떤 변화의 조짐이 보이면 행할 수 있음에 감사하라. 그 자체를 (덕) 복이라 생각하라. 그러면 그것이 좋은 결과를 초래하든 나쁜 결과를 초래해도 행하는 자체에 감사하게 된다. 최선을 다하라.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그 결과에 집착하지 마라. 결과를 생각하거나 집착하는 순간 그대는 고통의 번뇌 속에 있을 것이되, 행하되 행하는 행에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을 때 그대에게는 늘 문은 열려 있을 것이다. 비록 한쪽 문이 닫히면 한쪽 문이 열리는 것과 같이 모든 것들은 하나를 잃음으로 하나를 얻고, 하나를 얻음으로 하나를 잃는 ..
침 묵 '내 마음 돌아보기' 석가모니 부처님 명호에서 ‘석가’는 ‘능인’으로 모든 것을 다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격의 최고를 의미합니다. ‘모니’는 ‘적묵’으로 침묵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구하는 게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구하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고 남이 나를 향해 불같은 성질을 내더라도 돌이켜서 스스로 침묵을 지켜라. 이러한 이치를 잘 지키면 스스로 이롭고 남에게도 이롭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침묵하고 참는 사람에게 자신이 이긴 것으로 여겨 오히려 험담을 하니, 만일 참음의 과정이 없었다면 존경받는 인물로 자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참음. 침은 닦지 않아도 자연히 마르게 되니, 그런 때 ..
머리로 헤아리고 계산하여 육근에게 휘둘리지마세요 인연의 네 가지 첫째], 무인무연(無因無緣), 즉 인(因)이 없으니 연(緣)도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간의 모든 것은 암암리에 그렇게 되도록 운명 지어져 있어서 우연(偶然)이나 신(神)의 뜻에 의해 또는 숙명(宿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결코 인과(因果) 관계(關係)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돌에서는 기름을 짜낼 수 없지만 만약 기름을 짜낼 수 있는 경우 그들은 석유층의 구성과 형성원인은 탐색해 보지도 않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또 어린아이가 너무 지나치게 많이 먹어 탈이 나도 포식의 화인(禍因)은 살피지 아니하고 그저 “운명이로구나! 운명이야!” 하며 탄식할 뿐이며, 강도가 물건을 빼앗기 위해 사람을 상하게 하여도 그..
허상 응행 -획득의 허상- 아무리 많은 숫자를 동원해도 가장 많다는 사실을 표현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는 “하늘만큼 많다”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하다. 하늘은 보이는 것만도 크지만, 헤아리려고 하면 끝이 없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하늘만큼 많다”라는 말에 실감했을지 모르지만, 철들고 나서는 그런 말을 아예 없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무시해 버린다. 예를 들어 얼마만큼 사랑하느냐고 물었는데 하늘만큼 사랑한다고 답하는 것은 그 사랑이 진심이 아니라고 오해받기에 딱 걸맞다.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는 어떻게 말하는 것이 정답일까? ‘하늘만큼’을 실감하지 못하는 철든 사람들이 고안해 낸 정답은 “내가 죽을 때까지”라고 말하는 것인 듯하다. 모든 것을 무한정 얻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끝..
정해진 운명을 뛰어 넘으리!!! 정해진 운명을 뛰어넘으리라, 그러나 정해진 것은 없다 불교에서는 운명이나 숙명 대신에 스스로의 삶을 나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다는 인과(因果), 업보(業報) 론에 기초하고 있다. 누구나 물론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자기만의 삶의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살 것인지, 어느 정도의 학벌과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얼마 정도의 행복을 누리다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 업력(業力)을 받고 태어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떤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 어느 정도의 대학이나 학벌을 가지게 될 것인지, 어떤 회사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까지 진급을 하게 될 것인지, 어떤 인연을 만나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받게 될 ..
육조단경(六祖壇經) 六祖法寶壇經 原序(육조법보단경 원서) 妙道虛玄 不可思議 忘言得旨 端可悟明.묘도허현 불가사의 망언득지 단가오명. 묘한 도는 비어 그윽하여, 생각으로는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니 말을 버리고 뜻을 얻어야 근본적으로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으리라. 故 世尊 分座於多子搭前 拈花於靈山會上 似火與火 以心印心.고 세존 분좌어다자탑전 염화어영산회상 사화여화 이심인심. 그러므로 세존이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나누시고 영산회상에서 꽃을 잡으신 것이다. 불로써 불을 줌과 같아서 마음으로써 마음을 인가하는 것이다. 西傳四七 至菩提達摩 東來此土 直指人心 見性成佛.서전사칠 지보리달마 동래차토 직지인심 견성성불. 서역에서 28번을 전하여 보리달마에 이르자 동으로 이 땅에 오시어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셨다..
오직 일념으로 나아가는 길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번뇌 망상이 80억 도 더 된다고 합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念念生滅心, 그것이 모두가 다 마(魔)거든요. 이러한 번뇌의 마가 熾盛할 적에 염불을 하든 참선을 하든 기도를 하든 하나를 일념으로 해 나아가면 한 생각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 마치 급히 흘러내려가는 여울물에 달빛이 비쳤을 때 물길이 아무리 세차게 흘러가도 달빛은 떠내려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공부가 일념이 되어서 온갖 경계에 부딪치더라도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면 그야말로 動靜一如가 됩니다. 더 나아가면 夢中一如, 꿈속에서도 한결같이 되어서 나중에는 , 熟眠一如 잠이 푹 들어서 꿈도 생각도 없을 때 한결같이 깨어있는 주인공이 생생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경계에 부딪쳐서 心機一..
집착에 이끌려 종노릇 하지마세요 고정관념 틀에 이끌려 주인자리 뺏기지 말고 마음공부하세요! 너희들이 고정관념이 만구 불 변의 법칙이라고 믿고 따라다니고 있잖으냐! 저 눈사람도.....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지 생각이 일어나고 무엇인가, 육 근을 통해서 알음알이가 움직일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 화두를 드는 것뿐이여. 망상이 일어난다고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어. 망상 일어나는 그 찰나에 그대로 놔둔 체 턱 이뭣고, 화두만 거각하면 되는 것. 학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똑똑하고 안 똑똑한 것도 없고, 남자니 여자니 따질 것도 없고, 출가 재가도 상관이 없어.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슬픈 생각이 일어날 때는 슬픈 생각에 오래 잠겨있지 말고 퍼뜩 돌이켜서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속 상한 생각에 왜 오래 머물러 있냐는 그 말...
선가귀감(禪家龜鑑) 장엄한 대자연의 풍광은 그 어드런 군더덕이 붙을 이유외 명분이 없다! 증생들아! 알량한 자존심 버리구서는 머리로 헤아리지 말고 살아오면서 지은죄 참회하세요_()()()_ 禪定! [선정] 선(禪)은 범어(梵語) dhyāna의 음역과 ‘정(定)’은 범어 samādhi의 의역이다. 풀이하면 정려(靜慮), 사유수(思惟修)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함으로써,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누구나 선정의 힘이 없다면 정신이 흐릿해져 잘못된 판단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불교수행에 있어서 선정의 힘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마음을 한 곳에 제어할 수 있다면 처리하지 못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즉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과 같은 말이다. 선정을 통해 삿된 망념을 제거하면 그 자리에는..
업생(業生)에서 벗어나 원생(願生)을 살라 업생(業生)에서 벗어나 원생(願生)을 살라우리가 생사 일대사를 해결하게 되면 생사에 자유자재하게 됩니다.중생은 업생(業生), 업대로 삶을 살게 되지만, 참선 잘한 도인은 원생(願生), 원력을 세운 대로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겉보기에는 우리가 똑같이 살아가는 인생이라 하지만 차별이 생깁니다. 섭생은 업에 끄달려 살아가는 인생입니다.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저금통장에 있는 돈 까먹듯이, 과거에 지은 대로 금생에 받아서, 또 금생에 지은 대로 내생에, 흘러가는 것이 바로 업생, 업에 따라 사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한 분들은 업성에서 벗어나 원생을 살게 됩니다.원생은 서원, 원하는 바에 따라서 태어나고 서원을 세운 대로 살아갑니다. 큰스님들 중에는 돌아가실 때 ‘내가 다음 생에는,,..
일체세간은 마음이 만든 심상 여러분의 무기는 얼굴 아니라 정신적 아름다움, 일체세간은 마음이 만든 심상 부처가 세상 만들어낸 것처럼 중생도 세상 창조주이자 주인 마음과 부처 중생 다르지 않아 중생심이 불심, 불심이 중생심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다면 얼굴이나 몸매 앞세우기보다 정신적인 美로 세상 대처해야 아름다움은 욕망 절제서 나와 수행으로 스스로 컨트롤하길 마음에 관한 얘기에 앞서 마음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겠다. 마음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동심(動心)이고, 다른 하나는 부동심(不動心), 나머지는 전변심(轉變心)이다. 움직이는 마음은 바로 우리 마음이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능히 짐작되듯 부처님 마음이다. 동심과 부동심은 공기와 바람에 비유할 수 있다. 문 닫힌 방 안에 앉아 있으면 우리는 바람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미친 듯이 정진하면 무한 가피 열린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달이 지구를 도는 것, 그리고 사과가 떨어지는 것 등은 상호 간에 별 관계가 없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공부한 사람들이 이들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가 왜 공부를 해야만 하는가? 왜 기도를 해야만 하는가? 법칙을 공부한 사람들은 사과가 떨어지고 달이 돌고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 모두 중력의 법칙임을 이미 알고 있다. 끊임없이 공부를 해 나가다 보면 삼라만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게 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만유인력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게으르지 말라, 부지런히 정진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나아가라. 자신을 등불로 삼고 나아가라 하신 이유 역시 끊임없이 공부해 나가다 보면 삶의 깊은 ..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매일 세수하고 목욕하고 양치질하고 멋을 내어 보는 이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육신을 위해 돈.. 시간.. 열정.. 정성을 쏟아붓습니다. 이뻐져라. 멋져라. 섹시해져라. 날씬해져라. 병들지 마라. 늙지 마라. 제발 제발 죽지 마라. 하지만 이 몸은 내 의지와 내 간절한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살찌고, 야위고, 병이 들락거리고, 노쇠화되고, 암에 노출되고, 기억이 점점 상실되고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가 내 것인가. 자녀가 내 것인가. 친구들이 내 것인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닐진대 누구를 내 것이라 하고 어느것을 내 것이라 하련가.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만나고 흩어지는 구름인 것을 미워도 내 인연. 고와도 내 인연...
선 연 보시는 相 낼 일 아닌 마땅히 해야 할 일” 대승불교의 핵심은 나눔에 있습니다. 그것은 법(法)이건 물질이건 간에 모든 것을 중생의 바른 이익을 위해서 나누는 일입니다. 육바라밀의 제1바라밀이 베푸는 것인데 이것의 전제가 서지 않고서는 제2, 제3 바라밀의 실현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대승의 발심은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하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도 그 지혜마저 나누는 것이 대승적인 수행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수행은 공성을 체득하는데 있습니다. 깨달음의 체험은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그 요인이란 바로, 나에 대한 집착과 그로인해 일어나는 탐진치 삼독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나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버리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이기심의 집착으로..
불교는 진리의 종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아요. 세상의 이치, 즉 진리를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 처음 출가했을 때, 불교가 뭔지도 모르고 확실한 발심 없이 출가를 했어요. 그때는 깨달으면 공중을 붕붕 날고 대단한 신통이 나온다고 생각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습죠. 그런데 스님이 되어 불교를 공부하다 보니 하면 할수록 불교의 가치를 알게 되고 스님이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깨달음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없애야 합니다. 깨달음이 뭡니까? 화엄에서는 깨닫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일의제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했어요. 그럼 제일의제가 뭐냐? 연기의 법칙입니다. 연기의 법칙을..
구하고 바라지말고 꽁자라도 바라지 마세요 도적 심보도 다 내려놓아라!!! 무소유는 마음에 집착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집착하는 원인이 있으면 육입(六入)을 끊게 되어, 곧 현명함을 얻게 된다. 현(賢)은 몸이고 명(明)은 곧 도(道)이다. 해설 공(空)의 실천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까운 호흡 속에서도 얻을 수 있는데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이 바로 생(生)하고 멸(滅)하는 공을 보여준다. 들어오는 숨이 그치면 나가고, 나가는 숨이 그치면 들어오게하는 것이 공의 실천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생과 별의 생명현상이라고는 하지만 집착하면 안 된다. 집착하지 않고 생과 면에 따르는 것이 공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를 무소유(無所有)라고 한다. 무소유란 마음에 집착이 없는 상태이다. 정신을 호흡에 집중시키되 마음이 이에 집착하여 떠날 줄 모른다..
마음을 떠나 어찌 부처를 찾으랴 ! 마음을 떠나 어찌 부처를 찾으랴! 삼계의 뜨거운 번뇌가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하여 그대로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윤회를 면하고자 하면 부처를 찾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부처는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랴. 마음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은 거짓이라서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지만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없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온몸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은 언제나 신령스러워 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고 하였다. 삼계화택에서는 본래 청정한 마음이 경계를 따라 한없이 유전하다가 꼬일 데로 꼬인 모습이 탐진치 삼독으로 인한 불타는 집과 같은 상황에 비유하고 있다. 세상은 끝없이 무상을 설하고 생사의 불길이 걷..
고정관념과 사고방식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는 종교가 불교 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입니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불과 10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종교가 불교든 개신교든 천주교든 우리 민족의 모든 사람들의 몸속에는 불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떻습니까.? 기독교인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극성스럽게 다니면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대고 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느새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설치고 다니고 있습니다. 워낙 기복적인 종교이다 보니 귀가 얇고 근기가 하열下劣한 많은 사람들이 흡수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종교만..
본래 마음자리 불자의 삶 신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던 당시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신은 없다”라고 딱 잘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불교는 무신론적인 종교입니다. ‘화엄경’을 보면, 수많은 신들이 있고 법당에 신을 모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신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느냐. 자가당착이고 절대모순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신과 다른 종교 내지는 다른 분야에서 말하는 신과 어떻게 다르냐.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존재적이고 실존적인 신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신은 ‘마음의 변형’입니다. ‘내 마음이 변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신입니다. 간단한 해석이지만 여타의 신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의 조상은 어디냐. 바로 내 마음입니다. 신의 원류, 근원지는 ..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은 행복 누구나 가장 원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자신이 만든다는 것을 모릅니다. 어떤 이가 행복을 찾아 집을 나섰지요. 많은 세월 행복을 찾아 세상을 헤매었지요. 행복을 찾지 못한 나그네는 지쳐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담 넘어 매화가지에서 꽃망울 터진 것을 보고 행복을 느꼈습니다. 이 나그네처럼 우리는 공기를 마시고 살면서도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또 다른 곳에서 공기를 찾고 있는 셈입니다. 스스로 진리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 밖에서 진리를 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만인이 귀착해야 할 깨달음은 멀리서 다른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안에서 나 스스로 발견해야 합니다. 간혹 불자 중에는 불교를 '부처 믿는 종교'라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자기를 찾을 ..
헤아리고 계산하는 분심을 버려라 분별심을 버려라!!! ‘법을 설한다는 것은 법을 설한 것이 없으므로 법을 설한다’ 〈금강경〉에는 ‘설법이 설법이 아니라 이름이 설법이다’라는 말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무엇을 결정하거나 행동할 때 남으로부터 좋은 이야기를 듣거나 때로는 새로운 느낌을 받아서 그 영향으로 결정을 하기도 하고 남의 말을 참고로 결정을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실은 들은 것도 없고 느낌을 받은 것도 없다. 나 자신에게 이미 법이 있기 때문에 굳이 남으로부터 들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무명이라고 한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 자신을 개발할 줄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배워서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하지만 본래 마음에 있었던 지식을 개발을 통해 인식하는..
불자는 내일이 없다 수행자에게는 내일이 없다. 오직 지금·여기가 있을 뿐이다. 내일이나 모레를 기약해서는 안된다.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직시하면서 묵묵히 코끼리 걸음으로 걸어가라. 지금·여기가 바로 삼천대천 세계의 근본자리이며, 바로 영겁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자리이다. 고로 올바른 신행을 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그대로 영원이요 무한의 시간으로 살아간다. 지금·여기가 그대로 도량이다, 자성이 그대로 사찰이다. 세속을 떨치고 입산해야만 입산이 아니고 몸을 일으켜 집을 떠나야만 출가가 아니다. 마음의 산, 마음의 도량으로 입산하고 출가해야 한다. 밖으로 끄달리고 집착하는 마음을 거두고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그대로 귀의이다.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 즉, 가정 직장 학교가 그대로 여래의 처..
인과법!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보다 더 나은 상태이고, 그 절대의 경지를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제시한다면, 과연 궁극의 도달점, 최상의 경지는 어떠한 것일까, 그것이 명확해야 한다. 무지개나 신기루를 쫓다가 귀중한 생을 허비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불교에서는 그러한 경지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말하는데 피안(彼岸), 무상보리(無上菩提) 등이다. 그것은 모든 고통과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자재한 곳이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등 인과에 따라 받는 육도의 굴레를 벗어나 선정과 해탈, 신통명지(神通明地)에 이르는 것이다. 그 몸은 모든 세상에 나타나고 음성은 시방법계에 두루 미치며 마음과 지혜는 거리낌이 없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무한 생명으로 살게 된다. 참으로 별천지 이야기 같..
입으로 글로 저울질 하지말라! 입은 도끼요. 혀는 칼날이다. 이곳에 와서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다 해당되니 짓지 말라! 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우주의 주인공 됩니다” “다겁생 익힌 업장 벗어나야 본심 나타나지요” “법왕법(法王法)이 여시(如是) 니라.” 이 회상(會上)에 대중이 모인 뜻은 법왕의 법(法王法)이 이와 같다”는 뜻에 계합하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팔만사천 법문의 요지가 “법왕법 여시(法王法 如是)”라고 하는 말씀 안에 있는 것으로, 모든 대중들의 신령스러운 근본인 그 마음에 대한 표현인 줄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러나 이 경지는 번뇌에 파묻혀 사는 대중들의 지금 생각으로는 조금도 알 수 없으며 대중들의 이 알지 못하는 바를 부처님께서 격외(格外)로 보이신 바, ‘격외(格外)’라고 하는 것은 다자탑 전 분..
생을 마감하면 어디로 가는가! 삶이 아름다웠으면 죽음 또한 아름다워야 합니다. 생사불이(生死不二)!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상천도를 잘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천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라는 벽을 허물어버릴 때 조상의 벽도 허물어지면서, 나와 조상은 한 허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칼 융이나 칼 야스퍼스 등의 서양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있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나는 태어났다. 그러나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른다.’ ‘나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나는 반드시 죽는다. 그렇지만 언제 죽을지를 모른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예로부터 진시황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별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현대의 학문으로는 아직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