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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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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세간은 마음이 만든 심상 여러분의 무기는 얼굴 아니라 정신적 아름다움, 일체세간은 마음이 만든 심상 부처가 세상 만들어낸 것처럼 중생도 세상 창조주이자 주인 마음과 부처 중생 다르지 않아 중생심이 불심, 불심이 중생심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다면 얼굴이나 몸매 앞세우기보다 정신적인 美로 세상 대처해야 아름다움은 욕망 절제서 나와 수행으로 스스로 컨트롤하길 마음에 관한 얘기에 앞서 마음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겠다. 마음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동심(動心)이고, 다른 하나는 부동심(不動心), 나머지는 전변심(轉變心)이다. 움직이는 마음은 바로 우리 마음이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능히 짐작되듯 부처님 마음이다. 동심과 부동심은 공기와 바람에 비유할 수 있다. 문 닫힌 방 안에 앉아 있으면 우리는 바람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하심하면 만복이 저절로, 몸을 낮추면 만사형통! [범망경]에 보면 ‘좋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다 돌려주고 악한 일은 모두 자기에게 돌리라’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좋은 자리는 남에게 다 돌려주라 하셨습니다. 제일 나쁜 자리에 앉으라 하셨으니 그것이 모두 복을 받을 일이라는 말입니다. 스님이 되어 처음 배우는 에 보면 ‘人我山崩處(인아산붕처) 無爲道自成(무의도자성) 凡有下心者(범유하 심자) 萬福自歸依(만복자귀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인아산(人我山)이 무너지는 곳에서 무위(無爲)의 도가 저절로 이루어지나니, 무릇 하심(下心)함이 있는 이에게 만복이 스스로 귀의한다’는 뜻이지요. ‘내가 아니다’하는 그 상이 무너지는 곳에 함이 없는 도가 스스로 일어나고, 무릇 하심 하는 자에게는 만 가지 복이 모두 날 위해서 찾아옵니다. 하심이라는 공부는 정말 좋은 ..
미친 듯이 정진하면 무한 가피 열린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달이 지구를 도는 것, 그리고 사과가 떨어지는 것 등은 상호 간에 별 관계가 없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공부한 사람들이 이들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가 왜 공부를 해야만 하는가? 왜 기도를 해야만 하는가? 법칙을 공부한 사람들은 사과가 떨어지고 달이 돌고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 모두 중력의 법칙임을 이미 알고 있다. 끊임없이 공부를 해 나가다 보면 삼라만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게 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만유인력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게으르지 말라, 부지런히 정진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나아가라. 자신을 등불로 삼고 나아가라 하신 이유 역시 끊임없이 공부해 나가다 보면 삶의 깊은 ..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매일 세수하고 목욕하고 양치질하고 멋을 내어 보는 이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육신을 위해 돈.. 시간.. 열정.. 정성을 쏟아붓습니다. 이뻐져라. 멋져라. 섹시해져라. 날씬해져라. 병들지 마라. 늙지 마라. 제발 제발 죽지 마라. 하지만 이 몸은 내 의지와 내 간절한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살찌고, 야위고, 병이 들락거리고, 노쇠화되고, 암에 노출되고, 기억이 점점 상실되고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가 내 것인가. 자녀가 내 것인가. 친구들이 내 것인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닐진대 누구를 내 것이라 하고 어느것을 내 것이라 하련가.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만나고 흩어지는 구름인 것을 미워도 내 인연. 고와도 내 인연...
선 연 보시는 相 낼 일 아닌 마땅히 해야 할 일” 대승불교의 핵심은 나눔에 있습니다. 그것은 법(法)이건 물질이건 간에 모든 것을 중생의 바른 이익을 위해서 나누는 일입니다. 육바라밀의 제1바라밀이 베푸는 것인데 이것의 전제가 서지 않고서는 제2, 제3 바라밀의 실현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대승의 발심은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하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도 그 지혜마저 나누는 것이 대승적인 수행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수행은 공성을 체득하는데 있습니다. 깨달음의 체험은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그 요인이란 바로, 나에 대한 집착과 그로인해 일어나는 탐진치 삼독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나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버리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이기심의 집착으로..
불교는 진리의 종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아요. 세상의 이치, 즉 진리를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 처음 출가했을 때, 불교가 뭔지도 모르고 확실한 발심 없이 출가를 했어요. 그때는 깨달으면 공중을 붕붕 날고 대단한 신통이 나온다고 생각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습죠. 그런데 스님이 되어 불교를 공부하다 보니 하면 할수록 불교의 가치를 알게 되고 스님이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깨달음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없애야 합니다. 깨달음이 뭡니까? 화엄에서는 깨닫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일의제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했어요. 그럼 제일의제가 뭐냐? 연기의 법칙입니다. 연기의 법칙을..
구하고 바라지말고 꽁자라도 바라지 마세요 도적 심보도 다 내려놓아라!!! 무소유는 마음에 집착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집착하는 원인이 있으면 육입(六入)을 끊게 되어, 곧 현명함을 얻게 된다. 현(賢)은 몸이고 명(明)은 곧 도(道)이다. 해설 공(空)의 실천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까운 호흡 속에서도 얻을 수 있는데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이 바로 생(生)하고 멸(滅)하는 공을 보여준다. 들어오는 숨이 그치면 나가고, 나가는 숨이 그치면 들어오게하는 것이 공의 실천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생과 별의 생명현상이라고는 하지만 집착하면 안 된다. 집착하지 않고 생과 면에 따르는 것이 공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를 무소유(無所有)라고 한다. 무소유란 마음에 집착이 없는 상태이다. 정신을 호흡에 집중시키되 마음이 이에 집착하여 떠날 줄 모른다..
마음을 떠나 어찌 부처를 찾으랴 ! 마음을 떠나 어찌 부처를 찾으랴! 삼계의 뜨거운 번뇌가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하여 그대로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윤회를 면하고자 하면 부처를 찾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부처는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랴. 마음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은 거짓이라서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지만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없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온몸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은 언제나 신령스러워 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고 하였다. 삼계화택에서는 본래 청정한 마음이 경계를 따라 한없이 유전하다가 꼬일 데로 꼬인 모습이 탐진치 삼독으로 인한 불타는 집과 같은 상황에 비유하고 있다. 세상은 끝없이 무상을 설하고 생사의 불길이 걷..
고정관념과 사고방식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는 종교가 불교 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입니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불과 10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종교가 불교든 개신교든 천주교든 우리 민족의 모든 사람들의 몸속에는 불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떻습니까.? 기독교인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극성스럽게 다니면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대고 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느새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설치고 다니고 있습니다. 워낙 기복적인 종교이다 보니 귀가 얇고 근기가 하열下劣한 많은 사람들이 흡수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종교만..
본래 마음자리 불자의 삶 신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던 당시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신은 없다”라고 딱 잘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불교는 무신론적인 종교입니다. ‘화엄경’을 보면, 수많은 신들이 있고 법당에 신을 모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신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느냐. 자가당착이고 절대모순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신과 다른 종교 내지는 다른 분야에서 말하는 신과 어떻게 다르냐.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존재적이고 실존적인 신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신은 ‘마음의 변형’입니다. ‘내 마음이 변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신입니다. 간단한 해석이지만 여타의 신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의 조상은 어디냐. 바로 내 마음입니다. 신의 원류, 근원지는 ..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은 행복 누구나 가장 원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자신이 만든다는 것을 모릅니다. 어떤 이가 행복을 찾아 집을 나섰지요. 많은 세월 행복을 찾아 세상을 헤매었지요. 행복을 찾지 못한 나그네는 지쳐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담 넘어 매화가지에서 꽃망울 터진 것을 보고 행복을 느꼈습니다. 이 나그네처럼 우리는 공기를 마시고 살면서도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또 다른 곳에서 공기를 찾고 있는 셈입니다. 스스로 진리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 밖에서 진리를 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만인이 귀착해야 할 깨달음은 멀리서 다른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안에서 나 스스로 발견해야 합니다. 간혹 불자 중에는 불교를 '부처 믿는 종교'라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자기를 찾을 ..
헤아리고 계산하는 분심을 버려라 분별심을 버려라!!! ‘법을 설한다는 것은 법을 설한 것이 없으므로 법을 설한다’ 〈금강경〉에는 ‘설법이 설법이 아니라 이름이 설법이다’라는 말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무엇을 결정하거나 행동할 때 남으로부터 좋은 이야기를 듣거나 때로는 새로운 느낌을 받아서 그 영향으로 결정을 하기도 하고 남의 말을 참고로 결정을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실은 들은 것도 없고 느낌을 받은 것도 없다. 나 자신에게 이미 법이 있기 때문에 굳이 남으로부터 들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무명이라고 한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 자신을 개발할 줄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배워서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하지만 본래 마음에 있었던 지식을 개발을 통해 인식하는..
불자는 내일이 없다 수행자에게는 내일이 없다. 오직 지금·여기가 있을 뿐이다. 내일이나 모레를 기약해서는 안된다.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직시하면서 묵묵히 코끼리 걸음으로 걸어가라. 지금·여기가 바로 삼천대천 세계의 근본자리이며, 바로 영겁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자리이다. 고로 올바른 신행을 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그대로 영원이요 무한의 시간으로 살아간다. 지금·여기가 그대로 도량이다, 자성이 그대로 사찰이다. 세속을 떨치고 입산해야만 입산이 아니고 몸을 일으켜 집을 떠나야만 출가가 아니다. 마음의 산, 마음의 도량으로 입산하고 출가해야 한다. 밖으로 끄달리고 집착하는 마음을 거두고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그대로 귀의이다.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 즉, 가정 직장 학교가 그대로 여래의 처..
인과법!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보다 더 나은 상태이고, 그 절대의 경지를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제시한다면, 과연 궁극의 도달점, 최상의 경지는 어떠한 것일까, 그것이 명확해야 한다. 무지개나 신기루를 쫓다가 귀중한 생을 허비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불교에서는 그러한 경지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말하는데 피안(彼岸), 무상보리(無上菩提) 등이다. 그것은 모든 고통과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자재한 곳이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등 인과에 따라 받는 육도의 굴레를 벗어나 선정과 해탈, 신통명지(神通明地)에 이르는 것이다. 그 몸은 모든 세상에 나타나고 음성은 시방법계에 두루 미치며 마음과 지혜는 거리낌이 없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무한 생명으로 살게 된다. 참으로 별천지 이야기 같..
입으로 글로 저울질 하지말라! 입은 도끼요. 혀는 칼날이다. 이곳에 와서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다 해당되니 짓지 말라! 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우주의 주인공 됩니다” “다겁생 익힌 업장 벗어나야 본심 나타나지요” “법왕법(法王法)이 여시(如是) 니라.” 이 회상(會上)에 대중이 모인 뜻은 법왕의 법(法王法)이 이와 같다”는 뜻에 계합하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팔만사천 법문의 요지가 “법왕법 여시(法王法 如是)”라고 하는 말씀 안에 있는 것으로, 모든 대중들의 신령스러운 근본인 그 마음에 대한 표현인 줄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러나 이 경지는 번뇌에 파묻혀 사는 대중들의 지금 생각으로는 조금도 알 수 없으며 대중들의 이 알지 못하는 바를 부처님께서 격외(格外)로 보이신 바, ‘격외(格外)’라고 하는 것은 다자탑 전 분..
생을 마감하면 어디로 가는가! 삶이 아름다웠으면 죽음 또한 아름다워야 합니다. 생사불이(生死不二)!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상천도를 잘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천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라는 벽을 허물어버릴 때 조상의 벽도 허물어지면서, 나와 조상은 한 허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칼 융이나 칼 야스퍼스 등의 서양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있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나는 태어났다. 그러나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른다.’ ‘나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나는 반드시 죽는다. 그렇지만 언제 죽을지를 모른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예로부터 진시황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별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현대의 학문으로는 아직껏..
인욕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요? 가장 위대한 참음이 무엇인지 일러주는 말씀. “힘이 없으면서 힘 자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의 힘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진리를 멀리 벗어나니 이치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약한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참음이라 할 수 있으니 힘이 없으면 어찌 참고 용서하겠는가. 남에게 온갖 모욕을 당할지라도 힘 있는 사람이 스스로 참아내는 것은 가장 훌륭한 참음이니 스스로 힘이 없어 굴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찌 참는 것이라 하겠는가.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듯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고 남이 나를 향해 불같은 성질을 내더라도 돌이켜서 스스로 침묵을 지켜라. 이러한 이치를 잘 지키면 스스로 이롭고 남에게도 이롭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
禪 일행 삼매로 깨달음 모두가 禪 일행 삼매로 깨달음 스스로 물을 마셔봐야 찬 지 더운지 알듯이 깨달음이란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모든 외재하는 사물은 우리들 참모습의 그림자이며 모든 외적인 교리는 자성(自性)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메아리나 그림자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자성을 볼 수 있어야만 비로소 무엇 이 참된 자아인지 알게 됩니다. 현대인들의 마음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스트레스’에 의해 건강이 좀먹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과잉은 몸에 큰 변조(變調)를 가져온다는 것이 의학 적은 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율신경 실조증(自律神經 失調症)’이라고 부릅니다. 이 ‘스트레스’는 대부분 근대화의 산물로서 인위적으로는 예방이 거..
허망분별의 의식과 일상적 지식의 실상 허망분별의 의식과 일상적 지식의 실상 이전에 말한 적이 있는 이야기를 다시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것인 양 반복하게 되는 일이 잦아지는 것은 이미 정신적으로 노쇠에 접어들었다는 증거이다. 이 분명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같은 말의 반복을 말하는 당사자는 의식하지 못하고 듣는 사람이 주로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 정신적 노쇠가 덜한 편이라면, 말하고 나서라도 언젠가 했던 이야기임을 스스로 알아차리고서는 이야기할 상대를 잘 구분해야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이 같은 정신적 노쇠가 극심한 경우를 흔히 망령 들었다고 말한다. 망령이란 노년에 나타나는 정신 현상이라고들 알고 있지만, 나이와는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망령이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망령이라고 하지 않고 망상이라거나 망념이라고 칭한다..
안심입명 (安心立命) 우리 인간(人間) 치고서 마음이 안락(安樂)스럽고, 마음이 편안(便安)하고, 그러한 자기 안정(安定)을 도모하지 않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幸福)이라는 것도 마음이 안정(安定)되지 않으면 얻으래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법문(法門)의 대요도 모두가 다 안심법문(安心法門),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안심법문이 기본적인 법의 내용이 되어 있습니다. 달마스님께서 인도(印度)에서 일부러 중국(中國)으로 오신 뜻도 역시 안심법문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길을 갈 때에 길의 순로(順路)라든가 길목을 잘 모르면은 마음이 안정(安定)될 수가 없습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인생(人生)살이도 우리 갈 길을 훤히 알아 버리고서, 인생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그 의미(意味)도 알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目的)이 ..
내 안네 다 갖추고 있는데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건 다 다릅니다. 당장 밥 한 끼가 없어도 마음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밥은 저절로 들어오게 돼 있죠. 아마도 그 뜻을 잘 모르시는 분도 많을 거예요. 당장 밥 한 끼가 없는데 어떻게 좋을 수가 있나 이러겠죠. 자꾸만 나무를 비유로 드는데 나무를 한번 보십시오. 뿌리가 있기 때문에 그 싹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걱정을 안 해요. 그와 같이 우리도 불성이 있기 때문에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불성이 나를 형성시켜서 이끌어가고 있는데 왜 주인의 걱정을 내가 맡아서 해야 됩니까? 그렇다고 해서 잘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 자리에 맡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공했으니까 없다, 나는 본래 이미 죽은 거다, 공해서 죽은 거다, 자타가 같이 죽은 거다, 자타..
마음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삼재가 없다 끊임없이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뀝니다. 물 론 부처님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도 없이 찰나찰나 나투는 생활이라고 하지만 우리 중 세계의 사람이 사는 데는 시간도 만들어 놓고, 공간도 만들어 놓고, 날짜도 만들어 놓고, 달력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살아가시면서 한번 더 가슴에 손을 얹고 내 마음 을 스스로 개선시키도록 다짐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항상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를 모든 것은 자기 주처에서 하는 것이니 바로 자기 주처 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주처라는 것은 주장자도 되고 불성도 되고 주인공도 되고 자 부처도 됩니다. 하지만 그 이름들이야 뭐라고 부르든 어떻겠습니까마는 굳이 ‘주인 공(主人空)’이라고 하는 것은 천차만별로 살아나가는 일 중에 모두가 찰나찰나 나투 면서 과거로 돌아가고 아무것도 남..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불성(眞如佛性)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산시산(山是山)이요 수시수(水是水)라,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그런 법어(法語)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중생(衆生)이 본 산 그대로 산이요, 물 그대로 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삼독심에 가려서 실제적(實際的)인 실상(實相)을 못 보고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도 미처 못 보며, 또한 일체(一切)의 존재(存在)의 본성품(本性品)도 못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조사어록의 법어는 우리 중생이 보는 산 그대로 산이요, 우리 중생이 보는 물 그대로 물이라는 그런 의미(意味)가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法門)에는 많은 갈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고마문령(藁馬聞鈴)처럼 따라 ..
불성광명 얼마 안 가서 계절(季節)이 바뀌게 됩니다. 아직은 바람결이 쌀쌀하지만 그래도 봄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봄 그리고 여름이 오고 이내 다시 가을이 오고 하는 이것은 누가 막으래야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가장 쉬운 일인 동시에 하나의 우주(宇宙) 섭리(攝理)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참선(參禪) 공부도 그와 같이 가장 쉽습니다. 보통은 참선을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어려운 공부로 압니다. 그러나 참선(參禪)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쉬운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 용어로 안락스러운 법문 즉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은 까다롭고 경(經)도 많이 외워야 하지만 참선공부는 경을 많이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선(參禪)은 어디서 빌려온 것도 아..
참선(參禪)의 요체(要諦)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고 거기에 따르는 바른 행동(行動)을 함으로 해서 바른 깨달음과 위없는 행복(幸福)을 얻습니다. 따라서 바른 생각이 없으면 부처님 가르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무명심(無明心)이라든가 무지(無知)라든가 그런 것을 가지고서는 부처님 가르침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의 가지가지의 고난(苦難) 같은 것은 모두가 연원(淵源)이 무명(無明)으로부터 옵니다. 십이 인 연법(十二因緣法)을 다 배워서 아시는 바와 같이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해서 거기에 행동이 따르는 것이고, 또는 우리가 식(識)을 받는 것이고, 또 무명(無明)이 없으므로 해서 거기에 따라서 우리 모든 업장(業障)이 소멸(消滅)되고 드디어는 깨달음과 행복(幸福)이 수반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무명..
安心立命(안심입명) 이렇게 날씨가 궂은데 먼 거리에서 고생하시고 오신 것은 다른 데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좀 얻어봐야 되겠다는 자기 행복(幸福)의 한 조각이라도 얻어봐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이 있어서 오신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 인간(人間) 치고서 마음이 안락(安樂)스럽고, 마음이 편안(便安)하고, 그러한 자기 안정(安定)을 도모하지 않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幸福)이라는 것도 마음이 안정(安定)되지 않으면 얻으래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부처님 법문(法門)의 대요도 모두가 다 안심법문(安心法門),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안심법문이 기본적인 법의 내용이 되어 있습니다. 달마스님께서 인도(印度)에서 일부러 중국(中國)으로 오신 뜻도 역시 안심법문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길을 갈 때에 길의 순로..
나 없는 고향 길 찾아서! 위 없는 부처님의 이른바 法王法은 말을 떠나고 또는 一切相을 떠나 있습니다. 相對的인 말이나 형상은 제대로 진리를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法床에 오를 때는 마땅히 相을 떠난 法門, 또는 말을 떠난 법문, 즉 우리 중생의 상대 有限的인 말을 떠난 참다운 眞言을 法門해야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방(棒)을, 몽둥이를 텅텅 내리치기도 하고 그래서 禪機를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 따라서 이 자리는 그런 자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解說이 깃든 법문을 제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까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하고, 三寶에 귀의하는 그런 예식을 올렸습니다. 양족존(兩足尊)이라는 말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慈悲나 智慧나 그러한 모든 德性을 완전히 구비한, 완벽하게 구비한 부..
범부의 용심(用心)! 빛깔도 모양도 냄새도 더더구나 빗장도 없는 마음의 문이 관성과 업력으로 떠다니며 제멋대로 여닫으면 그것은 범부의 용심(用心)입니다. 수행의 동력을 통해 얻은 지혜로 어디서나 자유롭게 여닫되 만물을 유익하게 하면 그것은 바로 성인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부처님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리라고 하셨던 그 가르침 하나를 가지고 우선 자기를 단련하세요. 그것은 분수와 위치를 알고 자기 역할을 하는 것에서 이뤄집니다. 어리석은 마음 욕심 분노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욕망으로부터, 아는 것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때 마음은 그 본래의 빛을 찾습니다. 언뜻 지식의 습득과 지혜의 전승과정은 그렇게 상반되고 대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혜를 바탕으로 한 유용한 지식은 다시 큰 바다에서 합류하..
가피의 길 소리없는 길! 우리는 어제도 인생(人生)의 길을 걸었고 오늘도 어김없이 인생의 길을 걷고 있고 내일도 인생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할 것인가? 부처님의 법문(法門) 가운데 중요한 물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습마물(什徼物)이 임마래(恁徼來) 오. 이것은 중국 송(宋) 나라 때의 속음인데 이 뜻은 "무엇이 이렇게 있는가?" "무엇이 이렇게 왔는가?" 이런 뜻입니다. 다시 부언해서 말씀드리면 "나라는 것은 대체로 무엇이며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가?" 그런 뜻입니다. 내가 대체로 무엇인가 하는 그런 해답이 내려지면 응당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그런 우리 삶의 의미(意味)도 거기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제까지는 내가 인생의 의미대로 바르게 살았던가? 오늘은 바르게 살고 있는 ..
허공계가 다 하는 날까지! 허공계가 그냥 텅 비어있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텅 빈 것을 아는 그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하면 그 텅 빈 것을 아는 것은 따로 어떤 형상이나 자성을 가지고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텅 빈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앎과 텅 빔이 둘이 아니고 텅 빈 채로 있는 것이 살아서 안다. 즉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음이 살아있고 그것이 엄청난 지성(知性)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앎은 허공과 같이 텅 비었기 때문에 더럽혀질 수가 없다. 허공에다 아무리 똥칠을 해봐야 더럽혀질 수가 없는 이유와 같다. 또한 이 앎은 몸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 몸 안팎 따로 없이, 앎의 관점에서 보면 내 어깨가 결린다는 것을 아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