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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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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욕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요? 가장 위대한 참음이 무엇인지 일러주는 말씀. “힘이 없으면서 힘 자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의 힘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진리를 멀리 벗어나니 이치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약한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참음이라 할 수 있으니 힘이 없으면 어찌 참고 용서하겠는가. 남에게 온갖 모욕을 당할지라도 힘 있는 사람이 스스로 참아내는 것은 가장 훌륭한 참음이니 스스로 힘이 없어 굴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찌 참는 것이라 하겠는가.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듯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고 남이 나를 향해 불같은 성질을 내더라도 돌이켜서 스스로 침묵을 지켜라. 이러한 이치를 잘 지키면 스스로 이롭고 남에게도 이롭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
禪 일행 삼매로 깨달음 모두가 禪 일행 삼매로 깨달음 스스로 물을 마셔봐야 찬 지 더운지 알듯이 깨달음이란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모든 외재하는 사물은 우리들 참모습의 그림자이며 모든 외적인 교리는 자성(自性)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메아리나 그림자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자성을 볼 수 있어야만 비로소 무엇 이 참된 자아인지 알게 됩니다. 현대인들의 마음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스트레스’에 의해 건강이 좀먹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과잉은 몸에 큰 변조(變調)를 가져온다는 것이 의학 적은 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율신경 실조증(自律神經 失調症)’이라고 부릅니다. 이 ‘스트레스’는 대부분 근대화의 산물로서 인위적으로는 예방이 거..
안심입명 (安心立命) 우리 인간(人間) 치고서 마음이 안락(安樂)스럽고, 마음이 편안(便安)하고, 그러한 자기 안정(安定)을 도모하지 않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幸福)이라는 것도 마음이 안정(安定)되지 않으면 얻으래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법문(法門)의 대요도 모두가 다 안심법문(安心法門),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안심법문이 기본적인 법의 내용이 되어 있습니다. 달마스님께서 인도(印度)에서 일부러 중국(中國)으로 오신 뜻도 역시 안심법문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길을 갈 때에 길의 순로(順路)라든가 길목을 잘 모르면은 마음이 안정(安定)될 수가 없습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인생(人生)살이도 우리 갈 길을 훤히 알아 버리고서, 인생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그 의미(意味)도 알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目的)이 ..
내 안네 다 갖추고 있는데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건 다 다릅니다. 당장 밥 한 끼가 없어도 마음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밥은 저절로 들어오게 돼 있죠. 아마도 그 뜻을 잘 모르시는 분도 많을 거예요. 당장 밥 한 끼가 없는데 어떻게 좋을 수가 있나 이러겠죠. 자꾸만 나무를 비유로 드는데 나무를 한번 보십시오. 뿌리가 있기 때문에 그 싹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걱정을 안 해요. 그와 같이 우리도 불성이 있기 때문에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불성이 나를 형성시켜서 이끌어가고 있는데 왜 주인의 걱정을 내가 맡아서 해야 됩니까? 그렇다고 해서 잘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 자리에 맡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공했으니까 없다, 나는 본래 이미 죽은 거다, 공해서 죽은 거다, 자타가 같이 죽은 거다, 자타..
마음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삼재가 없다 끊임없이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뀝니다. 물 론 부처님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도 없이 찰나찰나 나투는 생활이라고 하지만 우리 중 세계의 사람이 사는 데는 시간도 만들어 놓고, 공간도 만들어 놓고, 날짜도 만들어 놓고, 달력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살아가시면서 한번 더 가슴에 손을 얹고 내 마음 을 스스로 개선시키도록 다짐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항상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를 모든 것은 자기 주처에서 하는 것이니 바로 자기 주처 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주처라는 것은 주장자도 되고 불성도 되고 주인공도 되고 자 부처도 됩니다. 하지만 그 이름들이야 뭐라고 부르든 어떻겠습니까마는 굳이 ‘주인 공(主人空)’이라고 하는 것은 천차만별로 살아나가는 일 중에 모두가 찰나찰나 나투 면서 과거로 돌아가고 아무것도 남..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불성(眞如佛性)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산시산(山是山)이요 수시수(水是水)라,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그런 법어(法語)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중생(衆生)이 본 산 그대로 산이요, 물 그대로 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삼독심에 가려서 실제적(實際的)인 실상(實相)을 못 보고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도 미처 못 보며, 또한 일체(一切)의 존재(存在)의 본성품(本性品)도 못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조사어록의 법어는 우리 중생이 보는 산 그대로 산이요, 우리 중생이 보는 물 그대로 물이라는 그런 의미(意味)가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法門)에는 많은 갈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고마문령(藁馬聞鈴)처럼 따라 ..
불성광명 얼마 안 가서 계절(季節)이 바뀌게 됩니다. 아직은 바람결이 쌀쌀하지만 그래도 봄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봄 그리고 여름이 오고 이내 다시 가을이 오고 하는 이것은 누가 막으래야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가장 쉬운 일인 동시에 하나의 우주(宇宙) 섭리(攝理)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참선(參禪) 공부도 그와 같이 가장 쉽습니다. 보통은 참선을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어려운 공부로 압니다. 그러나 참선(參禪)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쉬운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 용어로 안락스러운 법문 즉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은 까다롭고 경(經)도 많이 외워야 하지만 참선공부는 경을 많이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선(參禪)은 어디서 빌려온 것도 아..
참선(參禪)의 요체(要諦)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고 거기에 따르는 바른 행동(行動)을 함으로 해서 바른 깨달음과 위없는 행복(幸福)을 얻습니다. 따라서 바른 생각이 없으면 부처님 가르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무명심(無明心)이라든가 무지(無知)라든가 그런 것을 가지고서는 부처님 가르침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의 가지가지의 고난(苦難) 같은 것은 모두가 연원(淵源)이 무명(無明)으로부터 옵니다. 십이 인 연법(十二因緣法)을 다 배워서 아시는 바와 같이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해서 거기에 행동이 따르는 것이고, 또는 우리가 식(識)을 받는 것이고, 또 무명(無明)이 없으므로 해서 거기에 따라서 우리 모든 업장(業障)이 소멸(消滅)되고 드디어는 깨달음과 행복(幸福)이 수반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무명..
安心立命(안심입명) 이렇게 날씨가 궂은데 먼 거리에서 고생하시고 오신 것은 다른 데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좀 얻어봐야 되겠다는 자기 행복(幸福)의 한 조각이라도 얻어봐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이 있어서 오신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 인간(人間) 치고서 마음이 안락(安樂)스럽고, 마음이 편안(便安)하고, 그러한 자기 안정(安定)을 도모하지 않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幸福)이라는 것도 마음이 안정(安定)되지 않으면 얻으래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부처님 법문(法門)의 대요도 모두가 다 안심법문(安心法門),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안심법문이 기본적인 법의 내용이 되어 있습니다. 달마스님께서 인도(印度)에서 일부러 중국(中國)으로 오신 뜻도 역시 안심법문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길을 갈 때에 길의 순로..
나 없는 고향 길 찾아서! 위 없는 부처님의 이른바 法王法은 말을 떠나고 또는 一切相을 떠나 있습니다. 相對的인 말이나 형상은 제대로 진리를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法床에 오를 때는 마땅히 相을 떠난 法門, 또는 말을 떠난 법문, 즉 우리 중생의 상대 有限的인 말을 떠난 참다운 眞言을 法門해야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방(棒)을, 몽둥이를 텅텅 내리치기도 하고 그래서 禪機를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 따라서 이 자리는 그런 자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解說이 깃든 법문을 제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까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하고, 三寶에 귀의하는 그런 예식을 올렸습니다. 양족존(兩足尊)이라는 말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慈悲나 智慧나 그러한 모든 德性을 완전히 구비한, 완벽하게 구비한 부..
범부의 용심(用心)! 빛깔도 모양도 냄새도 더더구나 빗장도 없는 마음의 문이 관성과 업력으로 떠다니며 제멋대로 여닫으면 그것은 범부의 용심(用心)입니다. 수행의 동력을 통해 얻은 지혜로 어디서나 자유롭게 여닫되 만물을 유익하게 하면 그것은 바로 성인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부처님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리라고 하셨던 그 가르침 하나를 가지고 우선 자기를 단련하세요. 그것은 분수와 위치를 알고 자기 역할을 하는 것에서 이뤄집니다. 어리석은 마음 욕심 분노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욕망으로부터, 아는 것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때 마음은 그 본래의 빛을 찾습니다. 언뜻 지식의 습득과 지혜의 전승과정은 그렇게 상반되고 대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혜를 바탕으로 한 유용한 지식은 다시 큰 바다에서 합류하..
가피의 길 소리없는 길! 우리는 어제도 인생(人生)의 길을 걸었고 오늘도 어김없이 인생의 길을 걷고 있고 내일도 인생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할 것인가? 부처님의 법문(法門) 가운데 중요한 물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습마물(什徼物)이 임마래(恁徼來) 오. 이것은 중국 송(宋) 나라 때의 속음인데 이 뜻은 "무엇이 이렇게 있는가?" "무엇이 이렇게 왔는가?" 이런 뜻입니다. 다시 부언해서 말씀드리면 "나라는 것은 대체로 무엇이며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가?" 그런 뜻입니다. 내가 대체로 무엇인가 하는 그런 해답이 내려지면 응당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그런 우리 삶의 의미(意味)도 거기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제까지는 내가 인생의 의미대로 바르게 살았던가? 오늘은 바르게 살고 있는 ..
허공계가 다 하는 날까지! 허공계가 그냥 텅 비어있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텅 빈 것을 아는 그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하면 그 텅 빈 것을 아는 것은 따로 어떤 형상이나 자성을 가지고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텅 빈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앎과 텅 빔이 둘이 아니고 텅 빈 채로 있는 것이 살아서 안다. 즉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음이 살아있고 그것이 엄청난 지성(知性)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앎은 허공과 같이 텅 비었기 때문에 더럽혀질 수가 없다. 허공에다 아무리 똥칠을 해봐야 더럽혀질 수가 없는 이유와 같다. 또한 이 앎은 몸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 몸 안팎 따로 없이, 앎의 관점에서 보면 내 어깨가 결린다는 것을 아는 것..
진불(眞佛)! 참부처 진불(眞佛)!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한다. 생멸, 구정, 증감이 있는 것들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단지 인연화합으로 나타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소견으로는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이 우주마저도 언젠가는 멸하여 사라지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이러한 상대세계의 속성을 파악하시고 영원히 변치 않는 그 무엇을 찾아 나섰고, 결국에는 그것을 찾으셨으니 바로‘진불, 진여, 본래심’이라 한다. 그러면 이 세상에 오셔서 깨달음을 이루고 중생을 구제하신 부처님은 대체 누구신가? 사바세계의 중생구제라는 일대사를 이루기 위하여, 일부러 업을 만들어서 그 업력으로 이 세상에 오 신부처님은 화신불(化身佛)이다. 금강경에서 전하시기를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
수행자에게는 내일이 없다 "수행자에게는 " 오직 "지금·여기"가 있을 뿐이다. 내일이나 모레를 기약해서는 안된다.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직시하면서 묵묵히 코끼리 걸음으로 걸어가, "지금·여기"가 바로 삼천대천 세계의 근본자리이며, 바로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자 영겁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자리이다. 고로 올바른 신행을 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그대로 영원이요 무한의 시간으로 살아간다.” “지금·여기가 그대로 도량이다, 자성이 그대로 사찰이다. 세속을 떨치고 입산해야만 입산이 아니고 몸을 일으켜 집을 떠나야만 출가가 아니다. 마음의 산, 마음의 도량으로 입산하고 출가해야 한다. 밖으로 끄달리고 집착하는 마음을 거두고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그대로 귀의이다.”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 즉, 가정 ..
마음에 믿음 믿음의 땅 위에 사람을 세운다 세상을 사는 순리가 있다면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사람 관계가 좋은 사이로 유지되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먼저 사람의 마음에 감정의 균열이 생기며, 의심과 조바심이 일어나 불안감마저 조성되게 된다. 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느껴질 때는 스스로의 마음에 믿음이 생길 때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내가 너를 믿는다는 자기의 예상대로 상대의 행위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두고 흔히 쓰는 말이지만 알고 보면 그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불교에서의 믿음이란 범어 ‘스라다(sradha)’를 어원으로 가지고 있는 말이다. 이 말은 몰랐던 사실을 알고 났을 때 내 마음속에 ‘아! 그렇구나.’ 하는 이해와 확신이 생기는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선정삼매 지혜와 고요함은 다르지 않은 거 같다. 욕심 없음, 즉 분별하여 집착함이 없는 마음냄이 지혜이다. 다시 말해 지혜로움은 욕심내지 않는 평화로운 마음이고, 욕심 없는 상태가 고요함(선정)이다. 스스로를 볼 때 분별집착 없이 고요한 적이 있는가를 살펴본다. 행동이 태산 같지 못하고 말이 앵무새 처럼 산란한 것을 보니 마음이 고요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지혜롭지 못한 것이니 참회하고 다시 또 시작한다. 주객이 분리된 상태에서 ‘알려진’ 것은 부분적 진실일 뿐이고 지성에 의해서 대상을 파악하고 언어로 표현한들, 그것은 개념에 불과할 뿐 살아있는 구체적 사실로서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세존께서도 처음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주객으로 분리한 채 물으시다가, 마침내 주객이 일치한 상태[中道]에 이..
눈에 보이는 대상에끌려다녀 종노릇 하지 말라! 빛깔도 모양도 냄새도 더더구나 빗장도 없는 마음의 문이 관성과 업력으로 떠다니며 제멋대로 여닫으면, 그것은 범부의 용심(用心)입니다. 수행의 동력을 통해 얻은 지혜로 어디서나 자유롭게 여닫되 만물을 유익하게 하면 그것은 바로 성인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부처님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리라고 하셨던 그 가르침 하나를 가지고 우선 자기를 단련하세요. 그것은 분수와 위치를 알고 자기 역할을 하는 것에서 이뤄집니다. 어리석은 마음 욕심 분노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욕망으로부터, 아는 것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때 마음은 그 본래의 빛을 찾습니다. 언뜻 지식의 습득과 지혜의 전승과정은 그렇게 상반되고 대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혜를 바탕으로 한 유용한 지식은 다시 큰 바다에서 합류..
관념 불교! 관념 불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끊으면 부처되는 길도 그만큼 가까워져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사람이다. 최고의 지혜를 갖춘 부처로서 생각하건데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존재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다 보면 도리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본다. 사람의 마음은 사람에게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가장 싫어하는 네 가지의 상(相)이 있는데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다. 이 네 가지의 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며 또한 자신이 이것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세존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에 우..
법문!!! 다 내 안에 있다 나라·세계 살리는 힘도 내 안에 있어~아픈 사람 보고 마음 내는 것도 보살행~내 안에 보배 두고 왜 구걸하며 사는가,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좀 더 지혜를 넓히고, 마음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걸림없이 돌아갈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입니다. 보통 불교다 하면 어렵게만 생각하시고 머리깎은 사람만 하는 공부인 줄 아시는데 그게 아닙니다. 일체 세계, 우주 전체에 생명이 있는 것은 다 불교죠. 살아있는 생명의 근본이 ‘불’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이 바로 ‘교’인 것입니다. 풀 한 포기만 살아있어도 불교인데 네 종교 내 종교 따지는 것은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죠. 모두를 포함한 것이 바로 불교인데 말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마음의 폭이 넓어지고 또 한마음이라는 그 자체는 그냥 송두리째..
나[我]를 돌아보기 우리나라 사찰에 가보면 팔상전(八相殿)이라는 법당이 있습니다. ‘상’이란 글자는 ‘서로 상(相)’자로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여덟 가지 과정을 그림으로 그려 모시는 법당을 팔상전이라 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과정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이 팔상도입니다. 그중 첫 번째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입니다. 도솔천은 삼계 중생세계에 속합니다. 중생세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로 나누어집니다. 그 가운데서도 욕계에 육천이 있는데 육천 중의 하나가 도솔천입니다. 그곳은 중생세계이지만 모두가 자비심을 가지고 공덕을 닦는 곳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성불하시기 전에 도솔천에서 공덕을 닦으셨습니다. 선행에 따라 선혜보살, 호명보살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며 보살행..
묘법연화경제6권-법사공덕품 세존께서 상정진보살마하살에게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법화경을 수지하여 독송커나 해설커나 서사하면 이 사람은 마땅히 팔백의 눈의 공덕과 일천이백의 귀이 공덕과 팔백의 코의 공덕돠 일천이백의 혀의 공덕과 팔백의 몸의 공덕과 일천이백의 뜻이 공덕을 얻으리니, 이러한 공덕으로써 육근을 장엄함으로 하여금 다 청정하게 되리라. 이 선남자 선여인은 부모로부터 받은 청정한 육안으로 삼천대천 세계의 내외에 있는 산과 숲과 강과 바다를 보게 되며, 아래로는 아비지옥에 이르고 위로 유정천에 이르기까지 또 그 가운데 있는 일체 중생과 업의 인연과 과보로 나는 곳을 보아서 다 알리라.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고자 하사 게송을 설해 말씀하시었다. 만일 대중 가운데서 두려움 없는 마음으로 이 법화경을 설하는 그 공덕을 그대는 ..
나무에 구멍을 뚫듯이 딱따구리가 나무에 구멍을 뚫듯이 그렇게…. “내 속에서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할 인과로서의 업이 자꾸 나오는데 나오는 대로 놓고 놓아서 놓는 것마저도 없다 할 때까지 놓아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게 공했다더라’하면서 놓으면 그냥 공으로 빠져 몰아지지를 않는다. 그러기에 공도 아니고 색도 아닌 데서 주인공 하나를 세워 놓고 전부를 주인공으로 몰고 들어가라고 한 것이다. 빠져나갈 틈이 없이 몰고 들어가는 게 몰락 놓는 것이다. 그렇게 몰다 보면 마치 젖을 쥐어짜서 유선이 터지게 하듯이 답답해져서 빠져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는 쑥 빠지고 모는 그것만 남게 몰아붙여라. 그렇게 몰다보면 참나가 나온다. 바퀴가 구르려면 중심축이 잡혀 있어야 한다 . 맷돌도 정중앙에 심봉이 딱 꽂혀 있어야 곡식을 갈아낼 ..
비록 적게 가졌어도 나눌줄 알아야 보살” -염불은 부처님 만나려는 수행 불·보살 명호 마음에 채우면 일체 사량분별 끊어집니다 이곳 산 골짜기에도 이른 아침마다 맑고 투명한 새들의 노랫소리가 한결 정겹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경제 한파로 얼어붙은 중생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봄이 오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때일수록 많이 가진 이들이 적게 가진 사람들을 돌보며 지켜주는 보살행을 펼쳐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가족의 생계유지에 빠듯하고 여유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받아들여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온정을 베푸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펼치는 보살행의 근원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그 힘은 의외로 소박한 곳에서 나옵니다. 우리들의 번뇌가 고통에서 나오듯 보살행도 고통에서 시작..
허공계가 다 하는 날까지 “허공 끝이 어디인가?” “허공은 끝도 없고 시작도 없습니다.” 허공도 내 안에 있습니다.” “내 마음에 따라 춤을 춥니다.” 사람들이 독거유희락(獨居遊戱樂)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본래지당(本來知堂) “우리 마음은 본래지(本來知) 습성지(習性知) 두 가지입니다 본래지의 마음은 대자연의 마음이요 천연의 마음이라면 습성지의 마음은 세세생생 본인의 습관이 쌓여서 만들어진 마음입니다 본래지는 天地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며 시방법계 두두물물 산하대지 어디에도 꽉 차 있는 신령한 에너지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의 마음은 다겁생으로 익혀 온 습성지의 마음입니다 탐진 치, 거짓말, 양설(兩舌), 악구(惡口), 시기질투, 어리석음, 명예욕이 습성지의 마음입니다.” 인연 이전 본래지는 식(識)도 아니고 ..
和顔愛語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나 증오는 곧 그 사람의 표정으로 나타납니다. 얼굴 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든지 호흡이 거칠어지는가 하면 눈도 충혈되고, 온몸을 부르르 떨기도 합니다. 이렇듯 변한 우리의 모습이 바로 나찰 귀신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일단 화가 나면 대부분의 경우 이성을 잃기 십상입니다. 평소 와는 달리 거친 욕도 하고, 심한 경우 폭력을 휘두르는 이도 있습니다. 이런 우리 의 모습이 바로 나찰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나 자신일 수 있다는 사 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나찰이나 야차 같은 귀신들이 결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분노로 일렁이고, 욕심으로 한없이 요동을 치고 있 을 때 내가 바로 야차요, 나찰인 것입니다. 또한 이같은 분노와 욕심이 ..
無念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見性)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로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니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體)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本)을 삼고,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前念)과 지금의 생각(今念)과 다음의 생각(後念)이 생각생각 서로 ..
“매사 긍정하는 마음 파동이 곧 극락” 마음도 굳어지면 분열되면서 부스러기가 생깁니다. 마음이 굳어서 생긴 부스러기, 그것은 아지랑이 같고 연기같이 뿌옇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그것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업(業)이라 말씀하시고 경전에서는 형진(荊塵)이라 칭했습니다. 업은 집착할 때, 욕심낼 때, 화낼 때, 허망된 생각을 할 때, 이렇게 마음이 딱 굳을 때 생깁니다. 촛불이 잘 타다가 바람이 불거나 흔들리면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하면서 그을음이 나옵니다 여기 있는 이 책상도 몇 백 년이 흐르면 쩍쩍 갈라지고 부서져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이 정치를 하기 때문에 경제도 굳는 것입니다. 돈은 행복의 바로미터가 되지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심성이 가장 안 좋은 나라가 우간다이고 우리가 두 번째라고 합니다...
연의 존재 (연의 존재 ) 내 처지를 생각하는 것도 연상의 일환이기는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등 무간 연(等無間緣)이다. 유채꽃과 같은 물질은 등 무간 연이 될 수 없다. 등 무간 연이란! 마음의 활동에서만 원인으로 작용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은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하는 것은 보통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선은 우리의 생각 즉 기억을 한 장면으로 고정시킬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장면의 상황을 다시 끌어내어 계속 생생하게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서 후자는 등 무간 연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우리가 어떤 한 가지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비슷한 장면의 정지된 사진들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영화의 경우에는 장면과 장면이 잴 수 있을 정도의 시간 간격으로 ..
법을 찾아 부단히 가는 길 문제가 생기면 삶은 우리의 행동에 그 답을 묻습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하고 그러나 결과가 잘못되면 사람들은 반문한다 왜 이렇게 해야 하지? 그러나 우리가 부딪치는 삶의 문제는 포기할 수도 없고 풀지 않을 수 없기에 풀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존재를 제약하는 필연성이 모든 당위(當爲)의 근본 우리는 살아 있는 동물인 까닭에 행동을 전혀 포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용된 선택의 자유는 행동과 비행동(非行動)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행동 사이에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는 행동할까 행동하지 말까 하는 그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할까 하는 그것이다. 어떤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결심은 행동을 전혀 않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달리 행동하겠다는 판단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