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6) 썸네일형 리스트형 허공계가 다 하는 날까지! 허공계가 그냥 텅 비어있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텅 빈 것을 아는 그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하면 그 텅 빈 것을 아는 것은 따로 어떤 형상이나 자성을 가지고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텅 빈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앎과 텅 빔이 둘이 아니고 텅 빈 채로 있는 것이 살아서 안다. 즉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음이 살아있고 그것이 엄청난 지성(知性)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앎은 허공과 같이 텅 비었기 때문에 더럽혀질 수가 없다. 허공에다 아무리 똥칠을 해봐야 더럽혀질 수가 없는 이유와 같다. 또한 이 앎은 몸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 몸 안팎 따로 없이, 앎의 관점에서 보면 내 어깨가 결린다는 것을 아는 것.. 운명의 수레바퀴! 불교에서는 운명이나 숙명 대신에 스스로의 삶을 나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다는 인과(因果), 업보(業報) 론에 기초하고 있다. 누구나 물론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자기만의 삶의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살 것인지, 어느 정도의 학벌과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얼마 정도의 행복을 누리다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 업력(業力)을 받고 태어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떤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 어느 정도의 대학이나 학벌을 가지게 될 것인지, 어떤 회사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까지 진급을 하게 될 것인지, 어떤 인연을 만나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받게 될 것인지, 언제 어떤 병이나 사고로 얼마만큼 고통을 겪..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지마세요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지 말라!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는 종교가 불교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입니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불과 10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종교가 불교든 개신교든 천주교든 우리 민족의 모든 사람들의 몸속에는 불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떻습니까.? 기독교인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극성스럽게 다니면서 ‘예수천국 불신옥’을 외쳐대고 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느새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설치고 다니고 있습니다. 워낙 기복적인 종교이다 보니 귀가 얇고 근기가 하열(下劣)한 많은 사람들이 흡수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종교만이.. 진불(眞佛)! 참부처 진불(眞佛)!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한다. 생멸, 구정, 증감이 있는 것들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단지 인연화합으로 나타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소견으로는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이 우주마저도 언젠가는 멸하여 사라지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이러한 상대세계의 속성을 파악하시고 영원히 변치 않는 그 무엇을 찾아 나섰고, 결국에는 그것을 찾으셨으니 바로‘진불, 진여, 본래심’이라 한다. 그러면 이 세상에 오셔서 깨달음을 이루고 중생을 구제하신 부처님은 대체 누구신가? 사바세계의 중생구제라는 일대사를 이루기 위하여, 일부러 업을 만들어서 그 업력으로 이 세상에 오 신부처님은 화신불(化身佛)이다. 금강경에서 전하시기를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 업생(業生)에서 벗어나 원생(願生)으로! 우리가 생사 일대사를 해결하게 되면 생사에 자유자재하게 됩니다. 중생은 업생(業生), 업대로 삶을 살게 되지만 참선 잘한 도인은 원생(願生), 원력을 세운 대로 살게 된다. 겉보기에는 우리가 똑같이 살아가는 인생이라 하지만 차별이 생깁니다. 섭생은 업에 끄달려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저금통장에 있는 돈 까먹듯이, 과거에 지은 대로 금생에 받아서, 또 금생에 지은 대로 내생에 흘러가는 것이 바로 업생, 업에 따라 사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한 분들은 업성에서 벗어나 원생을 살게 됩니다. 원생은 서원, 원하는 바에 따라서 태어나고 서원을 세운 대로 살아갑니다. 큰스님들 중에는 돌아가실 때 ‘내가 다음 생에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들에게 불법을 전파하리라’라..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행복과 불행은 그 어디에도 없다. 중생들 자신들이 저질러서 얻은 인과이다. 인과는 썩지도 않는다 열반을 성취하게 되면 윤회가 끊긴다. 우리는 육도윤회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우리는 끊임없이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존재입니다. 내 마음이 열려 있을 때는 천사도 되고 닫혀 있을 때는 아귀도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일생의 윤회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자리에서도 윤회하는 존재입니다. 당생(當生)에 윤회하는 존재입니다. 내생에 정토에 태어나길 바라는 것은 바른 불자들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생전에 가정, 이웃 등을 위해 마음을 제대로 써야 합니다. 불교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가 있는데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 삼법인(三法印.. 수행자에게는 내일이 없다 "수행자에게는 " 오직 "지금·여기"가 있을 뿐이다. 내일이나 모레를 기약해서는 안된다.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직시하면서 묵묵히 코끼리 걸음으로 걸어가, "지금·여기"가 바로 삼천대천 세계의 근본자리이며, 바로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자 영겁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자리이다. 고로 올바른 신행을 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그대로 영원이요 무한의 시간으로 살아간다.” “지금·여기가 그대로 도량이다, 자성이 그대로 사찰이다. 세속을 떨치고 입산해야만 입산이 아니고 몸을 일으켜 집을 떠나야만 출가가 아니다. 마음의 산, 마음의 도량으로 입산하고 출가해야 한다. 밖으로 끄달리고 집착하는 마음을 거두고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그대로 귀의이다.”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 즉, 가정 .. 마음에 뿌리! 뿌리에 근원을 어디에 둘 것인가. 깊이 사유해 보세요 " 뿌리에 독이 있다면 나무 가지나 열매, 잎에도 독이 있고 뿌리가 약이라면 가지나 열매, 잎도 약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가에 따라 결과도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자 하면 반드시 보리심 (모든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기위한 마음으로 그 마음을 성취하기 위해 중생에게 이익을 먼저주는 마음)을 내어야 하며 나와 가족의 다음 생 축복을 위해 선행하고 기도하면 해탈은 못해도 다음생에 삼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생에서의 행복과 재산을 모으기 위한 기도를 한다면 이 생에서 약간의 행복이 있더라도 다음생에는 삼악도에 떨어질 수 있다고 하셨다. 온 중생의 이익을 위한 .. 집착이 없는 행이 만족함을 말하다! 내 마음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가을 자각하라! 우리들이 믿고 있는 사실처럼 불자란 아름다운 이름이고, 다른 사람이 따라오지 못할 아름다운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잠깐 더 부언하면 송아지나 말이나 개도 오식(五識)은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귀로 듣는, 코로 냄새 맡는, 입으로 맛보는, 몸뚱이로 촉감을 느끼는 이런 다섯 가지 알음알이는 짐승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오근이 하자고 하는 대로 감정 따라 산다면 그것은 짐승도 다 하는 일입니다. 다만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오식에 더해 의식이라는 육식(六識)이 있어서 나 자신을 바로 알려고 애를 쓰는 것, 불자라고 하면 이러한 육식을 뛰어넘어 제7 말나식을 길들여서, 제8 아뢰야식, 즉 내 무의식과 잠재의식에 내 인생의 .. 살아 계시는 부처님! 세존이시여! 내 곁에 살아계시는 부처님이 계셔서 좋다. 그 부처님은 때론 웃음으로 때론 묵묵하게 때론 호통으로 때론 실천으로 때로는 그저 마음으로 가르침을 주신다. 그래서 살아 계신 것이다. 그 부처님은 바로 나의 스승님 이시다. 원수로 보이지 않아서 스승이고, 축생으로 보이지 않아서 스승이고 귀신으로 보이지 않아 스승이다. 사람으로 그것도 비구의 모습으로 보여주시기에 스승이시다. 천만 다행이다. 내가 눈이 침침하지 않아, 이상한 모습으로 보지 않는것이 다행이고, 내 견해가 어두어서 스승을 헛것으로 착각하지 않기에 다행스런 일인 것이다. 내 습관되어진 업식에 따라 보이는 것이다. 가령 술을 좋아하면 불단의 감로수도 술로보이고, 술마시는 스승이 멋진 스승으로 보일것이며, 노래듣길 좋아하면 법문도 그저 한가.. 해탈문을 여는 연기! 연기! 선(禪)을 놓고 저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하에 선을 말한다면 이미 그르친 것입니다. 그것은 ‘말’(馬)을 보고 ‘사슴’(鹿)이라고 하는 것처럼 입을 떼는 순간 저는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선에는 주관과 객관이 따로 없고, 우리는 모두 본래 완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리는 말로는 해석할 수도, 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부처라 해도, 중생이라 해도, 번뇌라 해도, 지혜라 해도, 구속되어 있다 해도, 해탈해 있다 해도 모두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묵묵히 있다고만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선에 접근할 수 있도록 언어를 빌려 방편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라 하는데 여기서 궁금증이.. 헌신과 섬김 떠올리면 은근한 깨우침과 감동으로 가슴을 적셔주는 말들이 더러 있다. 헌신이라는 말도 그 하나이다 몸과 마음을 바쳐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우리들의 관계를, 나아가서 우리의 사회를 훈훈하고 평화롭게 해주는 덕성이다. 헌신이라 음미해 보면 해볼수록 마음이 낮아지고 다소곳해지며 옷깃을 여미게 하는 말이다. 다소 성글거나 서둘렸던 마음을 다잡아주며 커다랗게 마음을 넓혀주는 마음이다, 다 주고도, 다 놓고도, 다 바치고도 가장 넉넉한 마음이게 하는 말인 듯싶다. 누군가를 (獻身的)으로 사랑해 본다는 일, 누군가를 헌신적으로 섬겨오는 일, 어딘가에 헌신적으로 몰두해 본다는 것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그 자체로서 지고한 행복이요, 아름다움이요, 품격이기에 말이다. 헌신적이게 되.. 장엄한 산과 들녁의 묵향... 밤에 잠을 청할 때도 아무 생각 없이 바로자지 말고, 정신을 집중하여 아! 오늘 무슨 의미있는 일을 했던가? 어떤 선행을 했나? 를 사유해 본다. 좋은 일을 지었다면 그 모든 기쁨을 온 중생들에게 돌리고, 이 세상이 평화롭기를 기도한다. 혹여 악업을 지었거든 아주 작은것이라도 넘기지 말고 진실되게 참회하면서 "오늘도 내가 나를 해쳤구나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깊이 참회하면서 내일부터는 절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잠을 청한다 뭔가 거창하지 않다 하여 무시하지 말고 행복을 여는 아주 좋은 수행법으로 여겨야 한다 "나"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둘은 수시로 움직이면서 습관을 지어가네 혹여 아주 작은 악한 행을 지었는데도 그 순간 해로움이 없다 하여 가벼이 보면 안 되네 불씨가 비록 작.. 我[나] 나! 나와 남을 가르면 마음에 독이 생겨요. 편견 놓고 대하면 둘 아닌 하나지요. 먼저 ‘불교는 철학인가 종교인가?’ 하는 해묵은 질문을 말머리로 삼아 보겠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불교라는 종교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반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교를 바탕으로 한 철학적 입장은 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불교를 철학과 등치시키는 것은 종교의 생명이라 할 실천력을 거세시킬 위험을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 할 때, ‘종(宗)’ 자를 한번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종’은 뿌립니다. 뿌리를 안다는 것은 우주와 사물의 실상, 즉 본질을 안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아는 것에서 철리가 나오는 것, 그리고 그 철리를 연구하는 것이 철학이예요. 그러나 이성과 오관으로 따지는 철학은 인간의 이율배반 의식 위.. 불교적인 인격 맑고 향기롭게 살려면 실제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답은 불교적인 인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인격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의 경전인 불서(佛書)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은 경전을 많이 읽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불자인 우리는 부처님 경전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요즘에는 불교 책도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소책자로도 나오고, 수필이나 소설 같은 책들도 많습니다. 월간 [법공양]도 거기에 들어갑니다. 이런 책들을 가급적이면 많이 사가지고 집안의 요소요소에 놓아두면 좋습니다. 경전도 좋고 쉽게 풀이한 불서라도 좋습니다. 거실이나 주방이나 침대 머리맡에 두고, 언제든 펼쳐 들고 읽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 늘 바른 생각으로 수행 ‘삼라만상이 실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이는 분별 망상으로 인식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인연 따라 잠깐 머물러 있다가 언젠가는 없어지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딱 바로 잡아서 어떠한 환경이나 문제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바른 마음을 낼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불법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체 걱정 근심이 없는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영원히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자기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면 편안하거나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집, 높은 벼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 것으로 여기지만, 이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는 될지언정 행복의 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불법은 안에서 찾아야지 결코 밖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은 자기가 이끌어가지 않.. 불법의 요지 무엇이 불법의 요지입니까. “바로 그대가 몸과 목숨을 놓아버릴 곳이다.” 몸과 목숨을 놓아버릴 곳에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절체절명(絶對絶命) 일 수도 있으며 절대무사(絶對無私) 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진정한 답은 없다. 오직 두 가지 공심(公心·空心)이 절실하게 필요할 뿐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로서 깨달음의 완성인 빈 마음 공심(空心)과 중생을 요익케 하는 공심(公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몸과 목숨을 놓아버릴 때 시공을 초월한 참 지혜를 중생들에게 던져줄 수 있다”고 공심을 강조했다. 수행의 요처는 어디에 있는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바로 공심이었다. ‘공심’에는 진심(眞心)이 함축되어 활짝 열어놓은 문 밖으로는 봄이 재주를 넘듯 풍성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적.. 일행 삼매 [禪] 깨달음을 스스로 물을 마셔봐야 찬 지 더운지 알듯이 깨달음이란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모든 외재하는 사물은 우리들 참모습의 그림자이며 모든 외적인 교리는 자성(自性)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메아리나 그림자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자성을 볼 수 있어야만 비로소 무엇 이 참된 자아인지 알게 됩니다. 현대인들의 마음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스트레스’에 의해 건강이 좀먹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과잉은 몸에 큰 변조(變調)를 가져온다는 것이 의학 적은 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율신경 실조증(自律神經 失調症)’이라고 부릅니다. 이 ‘스트레스’는 대부분 근대화의 산물로서 인위적으로는 예방이 거의 불가능합니 다. 그.. 마음에 믿음 믿음의 땅 위에 사람을 세운다 세상을 사는 순리가 있다면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사람 관계가 좋은 사이로 유지되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먼저 사람의 마음에 감정의 균열이 생기며, 의심과 조바심이 일어나 불안감마저 조성되게 된다. 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느껴질 때는 스스로의 마음에 믿음이 생길 때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내가 너를 믿는다는 자기의 예상대로 상대의 행위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두고 흔히 쓰는 말이지만 알고 보면 그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불교에서의 믿음이란 범어 ‘스라다(sradha)’를 어원으로 가지고 있는 말이다. 이 말은 몰랐던 사실을 알고 났을 때 내 마음속에 ‘아! 그렇구나.’ 하는 이해와 확신이 생기는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선정삼매 지혜와 고요함은 다르지 않은 거 같다. 욕심 없음, 즉 분별하여 집착함이 없는 마음냄이 지혜이다. 다시 말해 지혜로움은 욕심내지 않는 평화로운 마음이고, 욕심 없는 상태가 고요함(선정)이다. 스스로를 볼 때 분별집착 없이 고요한 적이 있는가를 살펴본다. 행동이 태산 같지 못하고 말이 앵무새 처럼 산란한 것을 보니 마음이 고요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지혜롭지 못한 것이니 참회하고 다시 또 시작한다. 주객이 분리된 상태에서 ‘알려진’ 것은 부분적 진실일 뿐이고 지성에 의해서 대상을 파악하고 언어로 표현한들, 그것은 개념에 불과할 뿐 살아있는 구체적 사실로서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세존께서도 처음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주객으로 분리한 채 물으시다가, 마침내 주객이 일치한 상태[中道]에 이.. 노력한 댓가! 달라지는 삶! 중생의 번뇌는 창공에 구름이 일 듯이 무한 히 일어납니다.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라는 말은 팔만사천이란 숫자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많고 많은 번뇌가 무한히 일어난다는 말이지요. 중생들이 팔만사천가지 번뇌를 갖고 있으니, 그 번뇌를 모두 없애 버리기 위해서 많은 교설을 한 것이지, 세존께서는 한 법도 설하신 것이 없습니다. 세존께서 깨달으신 법을 ‘무유정법無有定法’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라 합니다. 법이란 꼭 ‘이것이다’라고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전부 하나로 통합니다. 그러니까 천경만 론(千經萬論)이 모르고 보면 말이 다르지만 알고 보면 다 똑같다는 뜻, 그렇게 온갖 번뇌를 소멸하는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은 모든 것은 누가 던져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 눈에 보이는 대상에끌려다녀 종노릇 하지 말라! 빛깔도 모양도 냄새도 더더구나 빗장도 없는 마음의 문이 관성과 업력으로 떠다니며 제멋대로 여닫으면, 그것은 범부의 용심(用心)입니다. 수행의 동력을 통해 얻은 지혜로 어디서나 자유롭게 여닫되 만물을 유익하게 하면 그것은 바로 성인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부처님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리라고 하셨던 그 가르침 하나를 가지고 우선 자기를 단련하세요. 그것은 분수와 위치를 알고 자기 역할을 하는 것에서 이뤄집니다. 어리석은 마음 욕심 분노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욕망으로부터, 아는 것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때 마음은 그 본래의 빛을 찾습니다. 언뜻 지식의 습득과 지혜의 전승과정은 그렇게 상반되고 대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혜를 바탕으로 한 유용한 지식은 다시 큰 바다에서 합류.. 관념 불교! 관념 불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끊으면 부처되는 길도 그만큼 가까워져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사람이다. 최고의 지혜를 갖춘 부처로서 생각하건데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존재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다 보면 도리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본다. 사람의 마음은 사람에게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가장 싫어하는 네 가지의 상(相)이 있는데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다. 이 네 가지의 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며 또한 자신이 이것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세존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에 우.. 공덕 베푸는 공덕! 세상을 사는 순리가 있다면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사람 관계가 좋은 사이로 유지되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먼저 사람의 마음에 감정의 균열이 생기며, 의심과 조바심이 일어나 불안감마저 조성되게 된다. 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느껴질 때는 스스로의 마음에 믿음이 생길 때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내가 너를 믿는다는 자기의 예상대로 상대의 행위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두고 흔히 쓰는 말이지만 알고 보면 그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불교에서의 믿음이란! 이 말은 몰랐던 사실을 알고 났을 때 내 마음속에 ‘아! 그렇구나.’ 하는 이해와 확신이 생기는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것이 그런 것이었다.’ 하고 이해했을 때 고개를 끄떡이며 수긍이 가는 상태의 .. 법문!!! 다 내 안에 있다 나라·세계 살리는 힘도 내 안에 있어~아픈 사람 보고 마음 내는 것도 보살행~내 안에 보배 두고 왜 구걸하며 사는가,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좀 더 지혜를 넓히고, 마음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걸림없이 돌아갈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입니다. 보통 불교다 하면 어렵게만 생각하시고 머리깎은 사람만 하는 공부인 줄 아시는데 그게 아닙니다. 일체 세계, 우주 전체에 생명이 있는 것은 다 불교죠. 살아있는 생명의 근본이 ‘불’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이 바로 ‘교’인 것입니다. 풀 한 포기만 살아있어도 불교인데 네 종교 내 종교 따지는 것은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죠. 모두를 포함한 것이 바로 불교인데 말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마음의 폭이 넓어지고 또 한마음이라는 그 자체는 그냥 송두리째.. 걸망[보따리] 나에게는 항상 메고 다니는 묘한 보따리가 있다 참으로 묘하다 응당히 넣고 싶은 건 다 넣을 수 있고 빼고 싶은건 다 뺄 수 있는 묘한 보따리다 하지만, 나에게 이익되는 것만 넣고 빼다 보니 보따리 줄 조여 매는 것이 점점 야무져 간다 누가 빼갈 까봐 심하게 조여 메는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한다 누가 통째로 들고 갈까봐, 이젠 잠 이루는것도 불안하다 그 묘한 보따리 어리석게 쓰는 것이 되려 나에게 장애가 됨을 알지 못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단두대를 향해 앞 다투어 뛰어가는 욕심 많은 소들과 뭐가 다르겠는가 참으로 묘한 보따리[따불빽] 그것은 저 많은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쓰라고 있는 것이다 조여 매지 않아도 되는 그 마음은 생명이 있든 없든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자 하는 보리심 아니겠는가! 번뇌 망상의 근원 불교수행은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번뇌 망상을 물리치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텅 비우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기도는 수행법 중 하나입니다. 세존께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번뇌 망상들을 물리치고자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기도를 하는 행위는 결국 깨달음의 길로 가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서원을 세우고 부처님께 지극히 기도를 할 때, 그 서원은 부처님이 이뤄주시는 것일까요? ‘저 사람은 내 명호를 지극정성으로 부르니까, 저 사람의 서원을 들어주자’ 하며 들어주시는 것일까요? 기도는 내 마음속에 있는 번뇌 망상들, 탁한 부분들을 맑게 해 마음을 밝힘으로써 업장이 맑아지게 되는 수행입니다. 업장은 업으로 인한 장애입니다. 그 장애가 맑아지니 그동안 장애에 의해하기 어려.. 마음 현상과 작용을 점검하는 공부 자기 마음공부 점검!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 진행과정을 스스로 점검 확인 할 수 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현상, 육체적·감각적 현상관찰의 수행을 확실하고 꾸준하게 지어가는 사람은, 확실히 자신의 심리적 변화와 사고적 진행과정을 보게 되며 동시에 육체적 행동은 조용해지고 보다 더 침착하며 몸의 움직임은 마음의 명령에 의해서 일어나며 한 동작은 하나의 마음에 의한 동작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는 마음공부해 가면서도 자신의 수행 자체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그 진척 정도를 알 수 없어 그저 막연히 깨침이 오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은 불합리하며 비논리적인 것이다. 이제 새로 배우는 자가 먼저 수행해 온 경험자에게 수행과정과 진행상황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먼저 수행한 자는 자기 자신의 수행에 대.. 나[我]를 돌아보기 우리나라 사찰에 가보면 팔상전(八相殿)이라는 법당이 있습니다. ‘상’이란 글자는 ‘서로 상(相)’자로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여덟 가지 과정을 그림으로 그려 모시는 법당을 팔상전이라 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과정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이 팔상도입니다. 그중 첫 번째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입니다. 도솔천은 삼계 중생세계에 속합니다. 중생세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로 나누어집니다. 그 가운데서도 욕계에 육천이 있는데 육천 중의 하나가 도솔천입니다. 그곳은 중생세계이지만 모두가 자비심을 가지고 공덕을 닦는 곳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성불하시기 전에 도솔천에서 공덕을 닦으셨습니다. 선행에 따라 선혜보살, 호명보살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며 보살행.. “마음이 극락도 지옥도 만든다” [인생고해] “삼라만상이 명경(明鏡)에 비추듯이 마음의 거울 또한 모든 것을 비추어 줍니다.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는 것이 부처입니다” 선(禪)의 마음은 진여(眞如)의 마음세계”라면서 번뇌와 무명심을 떨쳐내고 자유인(自由人)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자아 상실의 시대로 규정된 현대사회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선(禪)에서 찾을 수 있다면서, 우리 한국인의 마음에서 잊혀 가고 있는 선을 되살려야 한다. 윤리부재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얼마나 건전한 윤리의식을 가지느냐, 얼마나 진리를 가까이하느냐 하는 지성적 감각을 일깨워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기준은 바로 윤리회복에 있습니다. 불교는 이와같은 가치 창조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리라고 확신합니다. 불교윤리는 억압과 굴레를 강조하는..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16 다음